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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사진가 Aug 24. 2015

[내가 사랑하는 출사지 #8] 태안 신두리 해변

텅 빈 겨울 바다에서 만나는 프랙털(Fractal)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뚫고 이른 새벽 길을 재촉한다.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추위 속에서 고속도로를 오가는 차도 별로 없다. 캄캄한 밤 하늘에 별은 더욱 또렷하게 반짝이고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벗어나면서 어슴프레 밝아 오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면서 조금 무리다 싶을 정도로 속도를 올린다. 인적이 끊긴 한겨울 새벽의 태안반도는 너무나 적적하다. 길이 좁아지는 걸 보니 목적지에 거의 다다른 것 같다.


  일출시간에 맞추려면 조금 더 일찍 서둘렀어야 했다. 이미 일출시간은 훌쩍 넘겨 버렸고 하늘은 푸른 빛이 가득해진다. 서해 바다에서 등 뒤의 산으로 떠오르는 일출이 뭔 의미가 있겠냐 싶겠지만 사진가들에게는 매직 아워(Magic hour) 혹은 골든 아워(Golden hour)라는 소중한 시간이 있다. 일출과 일몰을 기준으로 전후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이에 해당한다. 떠오르기 직전, 혹은 이제 막 떠오른 햇살이 깊은 각도로 대기를 뚫고 오면서 낮 시간보다 훨씬 많은 산란이 이루어진다. 그 날 그 날의 습도와 온도에 따라 보라, 노랑, 빨강 등 다양한 색으로 대기가 물들기 때문에 매직 아워라고 불린다. 풍경 사진가들 중에는 매직 아워에만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


  목적지에 도착했다. 서둘러 차에서 내려 급하게 몇 컷 찍어 본다. 서너 컷 밖에 안 찍었는데 손가락이 얼어온다. 춥기는 엄청 춥다. 하긴 고속도로에서 바깥의 온도가 영하 15도까지 내려갔었으니. 든든히 입는다고 챙겨 입고 나왔지만 바닷가의 칼바람이 더해지니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춥다. 그나마 매직 아워의 끝자락에 걸쳐 다행이다. 푸른 하늘 사이사이로 분홍빛 구름이 예쁘다. 잠시 보온병에 담아온 따끈한 커피로 손과 몸을 녹여본다. 매직 아워의 황홀경은 아쉽게 놓쳤지만 그래도 좋다. 우리는 신두리 해변에 와 있으니까.


  태안반도에는 안면도의 꽃지해수욕장, 만리포, 천리포, 심지어 십리포까지 무수히 많은 해수욕장이 있다. 어디를 간들 매직 아워의 황홀경을 맛 볼 수 없을까? 왜 굳이 신두리여야 하는 것인지 이유는 확실치 않다. 사람들에게 덜 알려져서? 한겨울 바닷가의 이른 새벽은 어디든 텅 비어 있다. 백사장이 넓어서? 맨눈으로 보기엔 만리포나 꽃지나 신두리나 별 차이 없다. 개발이 덜 되어서? 이건 어느 정도 이유가 될 듯도 하다. 천연기념물인 해안사구 때문에? 이것도 나름 이유 중의 하나로 꼽을 수는 있겠다. 어쩌면 별 다른 이유 없이 끌리는 것, 그것이 신두리의 매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3Km에 달하는 해변, 썰물 때면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지는 백사장이 비현실적으로 광활하게 느껴진다. 도시에 살면서 이렇게 넓은 공간이 텅 비어 있는 채로 시야에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 스스로의 존재가 한 점으로 느껴지는 공간. 몇 걸음 거닐어 보아도 제자리를 걷는 듯한 신비감, 물이 드나드는 시간이면 앞으로 걷고 있어도 뒤로 가는 듯한 어지러움, 마술의 공간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백사장을 떠나 해안사구로 올라서면 바다와 하늘이 마주치는 수평선이 보인다. 해무라도 살포시 낀 날이면 바다와 하늘이 구분 없이 이어진다. 회색의 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트루먼쇼의 세상 끝 벽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해안사구 안 쪽으로 몇 걸음 내디디면 어느 순간 바다에서 사막으로 세상이 바뀐다. 겨울이면 야트막한 잡풀의 흔적들만 남아 있는 광활한 모래언덕이, 봄이면 푸른 풀밭으로 바뀐다. 가을이면 억새가 파도 치는 또 하나의 바다로 변신한다. 해안사구 깊숙이 걸어 들어갈수록 파도 소리는 멀어지고 대신 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다가온다. 어느 순간 넓디넓은 벌판 한 복판에 나 홀로 서 있음에 섬찟 놀란다.


  바다와 언덕이 만나는 백사장과 모래언덕에서 우리는 프랙털(Fractal)을 만난다. 바다 위 큼직하게 너울거리는 파도의 모양을 물이 빠진 모래톱에서 만나게 된다. 또한 모래 둔덕에 바람이 만들어 놓은 바람골은 거대한 사막의 모래언덕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때로는 부서져 내릴 것처럼 날카롭게, 때로는 여인네의 가슴팍처럼 둥글둥글하게 만들어진 바람의 흔적들. 그 위에 베두인 족의 천막을 그려 보기도 하고, 짐을 잔뜩 부린 낙타를 몰고 가는 아라비아 대상들의 행렬을 그려 보기도 한다. 낯선 사막에 불시착한 3PO와 R2D2가 보이기도 한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달라지는 패턴의 바람골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변해가는 드라마의 배경이 된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부지런한 아침 새의 발자국은 프랙털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킥음악이다.


  현실을 벗어나 만나는 비현실의 현실, 바다이면서 사막이기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과 존재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서 발견하는 프랙털의 묘미. 내가 신두리를 좋아하는 이유들일 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선뜻 권할 자신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심심한 공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면, 한 발짝 비켜 서서 현실을 바라보고 싶다면 한 번쯤은 찾아 볼 만한 공간이 신두리 해변이다. 조금 무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신두리를 찾는다면 사람 없는 이른 새벽을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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