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벌레들의 디즈니랜드, 120년의 기록 - 120년의 역사
하나의 거대한 서점, 진보초 : 책 벌레들의 디즈니랜드, 120년의 기록 - 120년의 역사
얼리버드 티켓팅으로 일찌감치 6개월전 예약했던 3월 도쿄 홀로 여행.
시간 여유가 있던 덕에 “Small Business 케이스 스터디”란 나름대로 테마 정해놓고 구글 맵에 한 땀 한 땀 핀을 꽂아가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일정의 완성은 1주일 전이 다가와야 부랴부랴 정리가 된다. 4박 5일,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일정에서 끝까지 고민했던 지역이 하나, “진보초”다.
출판 대국 일본의 고풍스러운 중고 서점 거리 풍경을 사진 기록으로 남겨놓은 의미는 있지만 코스에서 애매한 위치라 분주한 일정에 들어갔다 빠져나왔다 여러차례 반복되었다.
3월의 근사한 맑음 날씨를 기대했지만, 비는 오락 가락, 무엇보다 강풍주의보가 1주 전부터 일기예보를 채우느라 일정은 미궁 속으로 빠지고, 이 날씨 혼돈의 틈새에서 진보초는 – 역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 선택된다.
2일차 일정은 이케부쿠로에서 시작했다.
이상하게 지역명이 입에 착착 감겨 꼭 가리고 마음먹은 북부의 번화가는 하루 일정을 당당히 차지했다. 쇼핑몰 위주의 체크 포인트를 완료한 후, 돌아오는 길에 아키하바라 일정을 잡고 진보초를 중간에 끼어 넣었다.
체류 시간을 2-3시간 정도로 짧게 잡았고 사전 조사도 다른 지역보다는 부족했지만, 과거 청계천 중고서점 거리나 황학동처럼 역에 도착하면 주변에 서점들이 줄을 서서 환대해 주리라 기대하며 진보초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정도였다.
여행을 마치고 사진 정리하는 시점에 만난 책 “하나의 거대한 서점, 진보초”은 인연이 어긋한 아쉬움이 가득하다. 미리 보고 갔더라면 하루를 일정에 넣어도 될 만한 정보들로 가득 차 있으니, 나 억울하다.
100년의 전통을 지키기란 쉽지 않았고, 저마다의 사연을 찾아내는 일도 마찬가지.
관광객의 시점이 아닌 책 벌레 프로젝트의 진지한 시선으로 거리를 채운 대표 서점을 소개하고 주인장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단순한 상점이 아닌 지식거래소로 역할을 다하는 그들의 조용하지만 격동의 공간과 시간을 조망할 수 있었다.
첫번째 만나는 서점은 예상과는 달랐다.
바랜 종이에 묵은 책 냄새 나는, 가장 오래되거나 규모가 큰 책방 소개가 아니라 북 쉐어 서점인 “바이 올 리뷰스“가 등장한다.
개념은 간단하다.
분양형 서점이다.
각 코너별로 개인 또는 기업이 작은 책방을 임대하여 전체 서점을 채워 나가는 방식이다. 유사한 방식은 시부야에도 “마루마루 북스”가 운영되고 있다.
새 책 전문 서점이 아닌 중고서점이라 가능한 형태다.
개인은 자신들의 애장 서적이나 판매하고 싶은 목록을 자신의 색을 입힌 큐레이션으로 구성할 수 있다. 때로는 출판사가 직접 자사의 작품을 코디하고, 유명한 작가나 연애인들이 소장품을 진열하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수작업 도서를 만날 수도 있고, 많이 유통되는 책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유명인의 흔적이 남아 소장가치를 지닌 경우도 만날 수 있다.
진보초라는 고서점가에 어울리지 않지만, 스마트 결제도 가능하고 SNS 등을 통한 홍보를 각 코너 주인들이 실행하여 커다란 하나의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있다.
한달에 5만원 남짓한 임대료는 수익성을 감안하면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공급을 제공하는 접근은 탁월하다. 새로운 접근방식이 환영받고 지속되어 우리나라에서도 만나보게 될 날을 고대한다.
(서울에는 잠실 “서울 책보고”가 유사한 형태로 운영중이다.)
책에서 소개되는 서점 중 사진까지 찍어놓은 경우는 몇 장 되지 않는데 “잇세이도 서점”은 대로변이라 기억이 난다. 매장 입구 앞에 늘어놓은 저렴한 판매서적을 찍은 사진이 하나 나오는데 막상 내부로 들어가지 않아 미련이 남는다.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이면에는 전쟁의 상흔이나 지진 피해 같은 고통의 순간도 담겨있다. 고색창연한 외관이지만 아직도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건물만 봐도 종이 안에 담긴 인간의 지식을 전수하는 뚝심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내부 사진은 책을 통해서나 보게 되었는데 오래된 종이 냄새가 거대한 위용 속에 옅어 지는 장관을 작은 컷에서 건질 수 있었다. 정장 차림의 직원들이 전문가의 눈길과 태도로 고객을 응대한다는 모습에도 앞으로도 오랫동안 과거를 미래로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진보초에는 전문 고서점도 여러 군데 있다.
미술과 고서화를 다루는 서점도 있고, 눈독을 들이게 되는 영화, 연극, 희곡, 시나리오 전문 고서점인 “야구치 서점”이 등장한다.
인터넷에서 진보초를 검색하면 자주 등장하는 독특한 건물 모양과 책들의 서점이 바로 이 곳이다. 오래된 영화 잡지나 일본이 영화로 세계를 주름잡던 역사의 흔적들이 오래된 책장의 형태로 남아 매니아들은 물론 전공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초기에 전문서적의 신판만 취급하는 서점만 생기다 보니 중고도서는 내가 취급한다며 사업을 바꾼 창업자의 결심은 놀라운 선택이다. 결론적으로 오랜 기간 쌓여온 도서들이 하나의 거대한 자료 창고로 의미를 축적하고 있는 셈이고, 수많은 걸작들이 등장했던 일본 영화의 시나리오를 구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을 테니 중고서점이 제공할 수 있는 최대의 가치를 제공하는 최고의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바로 옆에 있던 클래식 음악 전문서점이 몇 년 전 폐업했다는 내용은 아쉽기만 하다. 클래식 음악의 깊이 있는 비평이나 음반 소개들이 음악에 광적인 일본인들의 손을 통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말이다.
책과 단짝은 단연 음악이다.
책장을 넘겨가는 지루함을 달래 주고, 때로는 활자와 음표가 교감하며 독서의 순간을 한층 고조시키는 경우도 많다. 진보초의 오래된 젊음의 거리인 하쿠산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고 음반가게인 "레코드사"도 오래된 고서점들과 오랜 시간을 공유하며 그 자리에서 음악 애호가들과 교류를 이어왔다.
유행은 돌고 돌아 음반 한 장 듣기 위해 귀찮은 판 갈이 작업을 해야 하는 LP가 요즘 인기다.
200여장 있던 오래된 음반이 스트리밍 시대에 맞지 않는다며 대 여섯 장씩 당근했는데 이제 남은 50장은 남겨 둬야 하냐는 고민이 드는 요즘이다.
미국에 이은 세계2위의 음반 시장이었던 일본은 록음악 강국이며, 시티 팝을 필두로 음악의 수준도 국제시장에서 먹힐 단계에 올라있었다. 버블경제 시대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는 J Pop 음반이 수입금지이던 시절이 있을 만큼 일본문화에 제한을 두었지만, 아시아 전역에서 그들은 현재 K Pop에 버금나는 인지도를 구가했다.
버블이 사라지고 문화에 대한 투자는 축소되니, 음반 시장에도 불황이 불어 닥쳤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모습은 중고 레코드 샵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책을 미리 읽어봤더라면 꼭 한 번 들려보았을 "레코드사"는 책에 실린 사진만으로도 풍경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구조이다. 골라놓은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미리 들어보는 중고 시장만의 장점도 충분히 활용될 듯하다.
진보초 메인 거리에도 "디스크 유니온"이라는 작은 규모의 중고레코드 점포가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신주쿠나 시부야에도 점포가 있는 제법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있는 상점이다.
장르와 아티스트 별로 LP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각 상품별로 음반과 커버의 상태를 표기한 이름표가 붙어있었고 터무니없는 가격보다는 합리적인 숫자를 제시하고 있었다.
CD 역시 북오프처럼 혼잡한 진열이 아닌 장르별로 잘 나뉘어져 있어 선택이 용이했고, 고르고 골라 2장을 득템하여 계산대로 향할 수 있었다.
국내 중고서점 시장은 인터넷 서점사의 오프라인 매장이 강력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자리를 잡았지만 평일의 한가한 모습을 보면 다소 비싸다고 느껴지는 가격대라도 소비자들이 기꺼이 구매하며 성황리에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생긴다.
일본도 대동소이한 오프라인 매장과 물리매체의 몰락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래도 두터운 소비자층과 아날로그 사고방식의 건재함은 진보초의 내일도 어둡지만 않게 떠받치는 원동력이 되지 않나 싶다.
책을 읽어가며 진보초라는 거대한 문화의 성을 담벼락만 겉 핥기로 보고 왔네, 후회가 몰려든다. 째깍거리는 일정 초침 소리에 떠밀려 한군데라도 더 매장 안으로 들어가 빼곡히 꽂혀 있는 바랜 책들의 작은 역사를 보듬어볼 여유를 가질 걸 -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때린다.
일본어를 모르니 각 코너 별 구분이라던가, 고서 하나의 기품 있는 역사 가치를 확인하지 못했더라도 120년 동안 이어진 책에 대한 존중의 시간을 공감할 수는 있었을 텐데.
진보초 방문 다음날 몇 년 만이야, 정말. 츠타야 다이칸야마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부야 투어를 마치고 뚜벅 30분을 걸어 도착한 낯익은 풍경.
5년 세월이 흘렀어도 스타벅스를 위시한 대부분 풍경은 변하지 않은 그대로였다.
후쿠오카의 츠타야를 가나, 광화문의 교보문고를 가나, 이제는 엇비슷해진 차세대 모델은 책 본연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에는 적당한 모습은 아니다.
차 한 잔과 풍경과 테마가 섞여 거대한 문화 용광로 같은 모습은 분명 서점이 새롭게 나가야 할 방향이고 대다수의 고객들이 선호하는 형태인 점은 인정하지만, 개별 취향으로는 점점 식상해지는 느낌이다.
잘 팔리지 않아도 그 자리에 존재하며 전체의 가치를 올려주는 책이 있고 코너가 있었는데, 빈 자리는 커피 머그잔 굿즈가 채워진다.
진보초라는 거대한 고전 서점이 도쿄 한복판에서 쇠퇴기를 지나 또다른 부흥기를 맞이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지점이다.
베스트셀러로 채워진 대중의 서점도 필요하지만, 판매량은 미약해서 모든 서점에서 취급할 수 없어도 지금 꼭 읽어야 하는 책을 구매할 수 있는 공간의 가치는 상업의 차원을 넘어 국가의 경쟁력과 문화 성장에 연결되는 가교역할이다.
민간에서 안된다면 국가가 나서더라도 독서를 위한 국민 인프라를 보호하고 육성해야 하지 않을까? 도서관 정책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고, 소장이라는 가치를 다시 한번 쳐다본다면 더욱 욕심이 생기는 영역이다.
도쿄에 언제 다시 방문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 기회에는 책에서 소개된 서점들을 일정을 넉넉하게 잡아 방문해서 책 한 권의 바램과 직원들의 태도까지 살피는 시간을 만들어보려는 계획을 짜보게 된다. 잠실에 있는 대형 중고서점도 조만간 방문한다는 일정을 적어 놓으며 책 속의 책방 이야기를 마무리하게 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