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구독 시대의 명암과 소유의 가치
복잡한 지하철 뒤에서 스마트폰 본다고 어깨를 쿡쿡 찌르는 사람들은 정말 꼴보기 싫다.
물론 어쩌면 나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은 모든걸 바꿔놓았고, 앞으로 새로운 디바이스가 등장할 수 있을지 의심갈 정도의 장약력을 뽐낸다.
수십 개의 알림,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피드, 그리고 3초마다 바뀌는 숏폼 콘텐츠들, 그럼에도 허기가 느껴질 때가 있지는 않은가? 배는 부르지만 영양실조에 걸린 것 같은 = 그런 묘한 공허감.
이런 디지털 피로감 속에서 젊은 세대들이 다시 vinyl 레코드를 구입하고, DVD나 블루레이이를 수집하고, 종이책을 선호하는 현상은, 어쩌면 단순한 복고 열풍을 넘어선 무언가를 시사하는 시그널은 아닐까?
이들은 디지털 네이티브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 미디어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물리 매체, 물리적 미디어의 완전한 부활은 요원한 일이지만, 가지고 있는 의미를 탐구해보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되찾아야 할 것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지 모른다.
소유의 철학 - "내 것"이라는 감각의 복귀
2025년의 우리는 월 구독료를 지불하고 음악을, 영화를, 심지어 소프트웨어까지 '빌려서' 사용한다. 넷플릭스, 유튜브, 스포티파이, 애플뮤직, 어도브. 오피스… 우리의 디지털 생활은 온통 구독 서비스로 전환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편의성 뒤에는 근본적인 불안감이 도사린다. 언제든 서비스가 중단될 수 있고, 좋아하는 콘텐츠가 갑자기 사라질 수 있으며, 구독료는 계속 우상향이라는 불안감이다.
(불현듯 돈을 주고 구매한 KT 전자책을 사업고사로 날려버린 아픔이 스멀거린다.)
어쩌면 우리는 구독이라는 편리함 속에 소유의 권리를 상실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15,000원으로 한달 동안 무제한 음악 감상한 자유로움과 다채로움은 놀라운 경험을 선물하지만, 내 시디랙 안에 꽂혀 물리 파손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돈을 추가로 지불하지 않아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소유”의 갈망을 채워줄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K-pop 팬덤 문화에서 실물 앨범 구매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독립서점들이 대형 온라인 서점의 공세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고 있는 것,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필름 카메라를 다시 찾는 것은 모두 "소유"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꿈틀거리며 디지털 시대의 숨은 갈망까지 끄집어내고 있음으로 여실히 보여준다.
물성의 기억과 정서적 연결
물리매체가 제공하는 소유감은 단순히 법적이거나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경험과 연결된다. CD 케이스를 열 때의 '딸깍' 소리, vinyl 레코드의 무게감, 책장을 넘길 때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되며 콘텐츠와의 더 깊은 정서적 연결을 구성한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물리적 행동과 연결된 기억은 더 오래, 더 생생하게 남는다고 한다. 종이책을 읽을 때 더 높은 기억 유지율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는 이를 뒷받침한다. 디지털 텍스트와 달리 물리적 책은 공간적 위치감각과 연결되어 있어서 "아, 그 내용이 왼쪽 페이지 아래쪽에 있었지"라는 식의 구체적 기억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목표로 한 문장을 찾아가며 더듬거리며 앞 뒤 내용까지 같이 눈에 익히는 과정은 기억력을 보강하고 경험을 확장한다.
전자사전에서 검색하는 단어가 바로 등장할 때와 종이 사전을 뒤적거리며 수많은 앞 뒤 표제어들과 눈인사를 하는 차이점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꽤 의미있는 어휘력 차이를 만드는 상황과 유사하다.
이는 창작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음악가들이 여전히 vinyl 발매를 고집하고, 작가들이 종이책 출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단순히 수익 구조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작품이 물리적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의 서재나 음반장 속에서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있다는 만족감. 창작자로서는 피할 수 없는 유혹이다.
품질의 역설 -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
Spotify의 음질에 대해 신랄한 비판이 많다. 열화된 음질은 스트리밍 업체에서는 불가피한 현실이다. 무손실 음원 스트리밍도 등장하고 있어 오히려 CD에 수록된 음악 보다 더 정교하고 데이터가 많이 담긴 음악들도 등장하지만 이것은 일부일 뿐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기술적 한계와 경제적 손익을 넘어선 철학적 쟁점으로 바라볼 수 도 있다.
우리는 왜 원본에 가까운 경험을 추구하는가?
왜 '압축되지 않은' 것을 선호하는가?
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진정성(authenticity)'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압축은 효율성을 위해 '불필요한' 정보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정보들이 정말 불필요한 것일까? 음악에서 제거되는 고주파나 저주파 음역대, 영상에서 생략되는 미세한 색상 정보와 입자의 크.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전체적인 경험의 질감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아날로그 필름의 영화, 레코드 판에 담긴 음악, 필름 카메라의 질감.
복고라는 이름으로 유행하는 요소들은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공간을 채우고 시간을 채우는 밀도 높은 원래의 날 것이 숨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리매체가 제공하는 또 다른 품질은 '방해받지 않는 경험'이다.
현대의 스트리밍 서비스들은 심지어 유료 구독자들에게까지 광고를 노출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경제적 논리로는 이해되지만, 사용자 경험 측면에서는 명백한 퇴행이다. 물리적 미디어는 이런 면에서 '순수한' 경험을 제공한다. DVD나 Blu-ray를 재생하면 제작자가 의도한 그대로의 영화를 볼 수 있고, CD를 틀면 광고 없는 온전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이는 특히 집중을 요하는 예술 작품이나 학습 콘텐츠에서 그 가치가 극대화된다. 교향곡을 듣다가 중간에 광고가 나오는 것, 철학책을 읽다가 팝업이 뜨는 것은 단순한 방해를 넘어 사고의 연속성을 파괴하는 행위다.
그뿐인가? 블루레이 시대로 넘어오며 많이 생략되어 아쉬움이 크지만, 화질은 열악해도 DVD 시절의 수많은 부가영상들과 보너스들은 아직도 콜렉터가 존재할 정도로 의미있다.
반지의 제왕 DVD 확장판은 박스부터 각 영화의 재킷, 그리고 다양한 선물로 지금도 애지중지하는 아이템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긴 영화의 몇 배나 되는 보너스 영상들은 아직도 십몇년이 지났지만 다 보지 못할 정도의 방대함이 숨어있다. 스트리밍에서는 엔딩 크레딧도 방해요소로 끝까지 보기 힘든 시대에서는 결코 다시 만날 수 없는 유산의 상실이다.
기술과 인간성의 균형점
물리적 미디어의 부활이 반드시 디지털 기술의 전면적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장 흥미로운 발전은 두 영역의 창의적 결합에서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QR코드가 포함된 vinyl 레코드를 통해 고음질 디지털 파일에도 접근할 수 있게 하거나, 책에 AR(Augmented Reality) 요소를 추가해서 추가 콘텐츠를 제공하는 방식들이다. 이런 접근은 물리적 미디어의 장점인 소유감, 의식성, 품질과 디지털의 장점인 접근성, 확장성)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마존에서 CD를 구매하면 아마존 뮤직으로 해당 음원을 즐길 수 있는 서비스는 개인적으로 무척 선호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 일부 출판사들도 이런 실험을 시작하고 있다. 종이책과 전자책을 함께 제공하거나, 실물 굿즈와 디지털 콘텐츠를 패키지로 구성하는 방식이다. K-pop 앨범들도 physical CD와 함께 스트리밍 서비스 이용권이나 디지털 포토북 등을 제공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물리적 미디어로의 회귀는 러다이트 운동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 인간의 경험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의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는 것이다.
스트리밍 기술은 분명 혁신적이고 유용하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종류의 콘텐츠에 최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느리고 번거로워도 더 의미 있는 경험을 주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다양성을 존중하듯이.
손끝에서 되살아나는 인간성
결국 물리적 미디어로의 회귀는 기술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인간다운 경험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다. 우리는 편리함과 효율성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찾고 있다. 소유의 기쁨, 집중의 깊이, 의식적 선택의 가치, 창작자와의 친밀한 연결, 세대를 아우르는 문화적 공유.
이런 것들은 구시대의 잔재가 아니라 인간이 언제나 필요로 해온 본질적 욕구다. 디지털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아니 발전할수록 더욱 이런 인간적 경험의 가치가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대립이 아니라 조화다. 기술의 편익을 누리면서도 인간적 경험을 포기하지 않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그 균형점에서 우리는 더 풍요롭고 의미 있는 문화적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손끝에서 되살아나는 vinyl 레코드의 따스함, 책장을 넘길 때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블루레이 케이스를 여는 순간의 설렘, 이런 작은 의식들이 모여서 우리의 일상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풍성함이야말로 진정한 인간다운 삶의 조건일 지 모르겠다.
미래는 더 많은 기술과 더 빠른 속도를 약속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더 깊은 경험과 더 의미 있는 연결이다. 물리적 미디어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서이며, 우리가 놓치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