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적 논쟁과 우리가 받은 혜택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을까?
코로나 시절, 백신 실험이 성공했다는 뉴스만 간절히 기다리며 마음을 졸였었다.
의학품 하나가 승인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여러 복잡한 단계를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급한 마음은 뭐든 건너뛰더라도 결과물만 간절히 바랬다.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고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 국가가 마비사태에 이르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는 코로나가 가져올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 스스로가 실험체가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는 백신과 치료제 뒤에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실험실에서 조용히 연구하던 과학자들이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순간들 말이다. 이들은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개척자이자, 때로는 무모한 도전자였다. 그들의 선택은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했지만, 동시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윤리적 논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1950년대 미국의 여름은 공포의 계절이었다.
해마다 수만 명의 어린이들이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거나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1952년 한 해에만 2만 1천여 명의 아이들이 불구가 되었고, 3천 100여 명이 사망했다. 부모들은 여름만 되면 자녀들을 집 안에 가둬두었고, 수영장과 극장은 문을 닫았다. 이 공포 속에서 피츠버그 대학의 조너스 소크 박사는 하루 16시간씩, 휴일도 없이 백신 개발에 매달렸다.
소크는 전국 어린이 장애 기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7년간 연구에 몰두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바이러스를 죽여서 주입하는 사백신 방식이었다.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이지만 당시로서는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또한 사백신은 감염 위험이 없었지만 효과에 대한 의문도 많았다.
1953년 11월, 소크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자신이 개발한 백신의 첫 번째 실험 대상으로 자기 자신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아내와 세 아들 - 9살 피터, 6살 대럴, 5살 조나단 - 에게도 백신을 접종했다. 주사 맞기를 싫어하던 피터는 부엌 쓰레기통 뒤에 숨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자신이 의학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2주 후 혈액 검사 결과, 가족 모두에게서 폴리오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생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백신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소크는 이 결과를 언론에 공개하면서 자신의 확신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과학자가 자신의 가족에게 백신을 접종할 만큼 안전하다면, 다른 부모들도 안심하고 자녀들에게 접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1954년에는 44개 주 180만 명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임상시험이 진행되었다. 당시 IBM의 펀치카드 컴퓨터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해야 했다. 1955년 4월 12일, 결과가 발표되었다. 백신은 가장 흔한 폴리오 타입에 90% 이상의 예방 효과를 보였다. 발표 당일, 전국의 부모들은 환호했다.
더욱 놀랄 일은 다음 대화에서 알 수 있다.
"누가 이 백신의 특허를 소유하고 있습니까?" 소크의 대답은 간결했다. "국민입니다.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수 있습니까?"
당시 추산으로 약 70억 달러의 가치가 있었던 특허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백신이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를 바랐다.
1963년 3월 23일 새벽 1시경, 펜실베이니아의 한 가정집에서 5살 소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목이 붓고 아파서 잠에서 깬 제릴 린 힐레먼이었다. 대부분의 아버지라면 진통제를 주고 아침에 병원에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 모리스 힐레먼은 다른 선택을 했다.
힐레먼은 당시 제약회사 머크에서 백신 개발을 총괄하던 세계적인 과학자였다. 딸의 증상을 보는 순간, 그는 유행성 이하선염, 즉 볼거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과학자로서의 본능이 작동했다. 그는 차를 몰고 연구소로 가서 면봉과 배양액이 든 병을 가져왔다. 돌아와서 다시 한 번 딸을 깨웠고, 목 안쪽을 면봉으로 문질러 바이러스 샘플을 채취했다. 정말 미친 짓 일 지도 모르겠다.
제릴 린 역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밤중에 아빠가 이상한 짓을 하는지. 하지만 힐레먼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샘플을 냉동 보관하고, 곧바로 백신 개발에 착수했다.
힐레먼은 딸의 목에서 채취한 바이러스를 닭의 배아 세포에서 반복적으로 배양하며 약독화시켰다. 바이러스의 병원성을 약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3년 후인 1966년, 그는 실험용 백신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첫 번째 접종자 중 한 명으로 제릴 린의 여동생 커스틴을 선택했다.
1967년 12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힐레먼의 볼거리 백신을 승인했다. 당시로서는 가장 빠른 백신 개발 기록이었다. 단 4년 만에 실험실에서 시장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 백신은 'Jeryl Lynn 균주'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30억 회분 이상 생산되었다.
1991년, 제릴 린은 자신의 아들 콜린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MMR(홍역·볼거리·풍진) 백신을 접종받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의 목에서 채취된 바이러스가 수억 명의 아이들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제 아들을 보면서 정말 가슴 벅찬 감정을 느꼈어요. 그 아이가 볼거리뿐 아니라 다른 많은 질병들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어 다행이다.
1980년대 초, 의학계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위 속의 강력한 산성 환경에서는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위궤양은 스트레스, 매운 음식, 과도한 위산 때문에 생긴다고 믿었다. 환자들은 제산제를 평생 먹거나 위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호주 퍼스의 젊은 의사 배리 마셜은 병리학자 로빈 워런과 함께 이상한 발견을 했다. (반가운 이름 아닌가!) 위궤양 환자들의 위 조직에서 나선형 박테리아가 관찰된 것이다. 그들은 이 박테리아가 위염과 궤양의 원인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박테리아에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학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수십 년간의 정설을 뒤엎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마셜이 논문을 투고해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동물 실험도 실패했다. 쥐, 돼지, 원숭이에게 헬리코박터균을 투여해도 위궤양이 생기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마셜의 이론을 비웃었다.
1984년, 좌절감에 빠진 마셜은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몸으로 직접 증명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먼저 자신의 위에 헬리코박터균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위궤양 환자의 위 조직에서 채취한 박테리아를 배양했다. 아침 일찍, 빈속에 마셜은 배양액을 들이켰다. 맛은 "약간 신맛이 났다"고 그는 나중에 회상했다.
며칠 후부터 증상이 나타났다. 메스꺼움, 구토, 심한 복통. 위 내시경 검사 결과 급성 위염이 발생했고, 위 점막이 붓고 염증으로 붉게 변해 있었다. 마셜은 자신의 가설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는 항생제를 복용했고, 2주 만에 완치되었다.
이 대담한 자가실험은 의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학술지들은 더 이상 그의 논문을 거절할 수 없었다. 후속 연구들이 이어졌고, 위궤양 치료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 오늘날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감염은 간단한 항생제 치료로 완치된다. 수술이 필요한 경우는 급격히 줄었다.
2005년, 배리 마셜과 로빈 워런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는 "1982년 헬리코박터균의 발견은 비범하고도 기대를 뛰어넘은 것"이라며 "치료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소화기 궤양이 두 박사의 연구 덕분에 간단한 처방으로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마셜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학계의 통념에 도전하려면 확고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극단적인 방법도 필요하죠. 하지만 제가 운이 좋았던 것은 헬리코박터균이 치명적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의 방문은 요구르트와 관련이 있는건지 한 번 확인해봐야겠다.
모든 자가실험이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과학자의 확신이 오히려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892년, 74세의 독일 공중보건학자 막스 폰 페텐코퍼는 자신의 경쟁자인 로베르트 코흐를 증명하기 위해 대담한 실험을 계획했다. 코흐는 콜레라가 특정 박테리아에 의해 발생한다고 주장했지만, 페텐코퍼는 박테리아만으로는 질병이 발생하지 않으며 불결한 환경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페텐코퍼는 과학자들을 모아놓고 콜레라 박테리아 배양액을 마셨다. 약 10억 마리의 콜레라균이 들어있는 양이었다. 그는 자신이 깨끗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콜레라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며칠 후 페텐코퍼는 설사와 복통을 겪었지만, 심각한 콜레라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승리를 선언했다. 자신이 옳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오늘날 우리는 콜레라가 명백히 박테리아에 의해 발생하며, 사람마다 면역력과 감수성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페텐코퍼는 단지 운이 좋았거나 이미 부분적인 면역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더 비극적인 사례도 있다. 1900년 쿠바에서 황열병 연구를 진행하던 미군 의무대의 제시 라제어는 모기가 황열병을 옮긴다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자신과 동료들에게 감염된 모기를 접촉시켰다. 그의 동료 제임스 캐롤은 심각한 황열병에 걸렸고, 라제어 자신도 1900년 9월 감염되었다. 일주일 후 라제어는 사망했다. 그는 30대 초반이었다.
라제어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희생으로 모기가 황열병을 전파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이는 질병 통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19세기 초 미국의 의대생 스터빈스 퍼스는 더욱 극단적인 실험을 했다. 그는 황열병이 전염성이 없고 더위와 자극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황열병 환자의 구토물을 자신의 팔에 난 상처에 부었다. 효과가 없자 구토물을 눈에 넣었다. 그래도 감염되지 않자, 구토물로 '사우나'를 만들어 증기를 들이마셨다.
마침내 그는 신선한 구토물을 직접 마셨다. 환자의 입에서 나온 것을 바로 삼킨 것이다. "맛은 아주 약간 신맛이었다"고 그는 기록했다. 놀랍게도 그는 황열병에 걸리지 않았다. 1804년 논문에서 그는 자신의 이론이 입증되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퍼스는 완전히 틀렸다. 황열병은 명백히 전염성이 있으며, 모기를 통해 전파된다. 구토물을 마시는 것으로는 감염되지 않는다. 바이러스가 혈류로 직접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퍼스의 역겨운 실험은 과학적으로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그가 입증한 것은 오직 그의 위장이 강철 같다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일 뿐이다.
1986년 개봉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공포영화 The Fly(플라이)는 자가실험의 위험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천재 과학자 세스 브런들이 순간이동 장치를 개발하는 과정을 그린다. 무생물 전송에 성공한 그는 생명체 실험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자신의 몸을 전송하기로 결정한다.
브런들은 질투와 술기운에 판단력을 잃은 상태에서 텔레포트 장치에 들어간다. 그는 장치 안에 파리 한 마리가 함께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전송 과정에서 컴퓨터는 브런들과 파리를 유전자 수준에서 융합시켜버린다. 처음에는 놀라운 신체 능력의 향상으로 나타났던 변화는 점차 악몽으로 변한다. 머리카락과 치아가 빠지고, 피부가 벗겨지며, 그는 서서히 인간의 모습을 잃어간다.
영화는 픽션이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라도 자신의 실험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 예상치 못한 변수는 언제나 존재한다. 브런들의 비극은 그가 충분한 안전장치 없이, 감정에 휩싸인 상태에서 성급하게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완전히 괴물로 변한 브런들은 연인에게 자신을 쏘아달라고 애원한다. 과학적 진보를 향한 그의 야망은 결국 자기 파괴로 귀결된 것이다. 이는 과학자가 자신과 가족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생명윤리학자 아서 캐플란은 이렇게 말한다.
"자가실험은 과학자 개인의 용기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연구 윤리의 문제입니다. The Fly 같은 극단적인 결과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예측 불가능한 부작용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의 자가실험은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현대의 윤리 기준으로 보면 많은 문제가 있다. 특히 자녀와 가족을 실험 대상으로 삼은 경우는 더욱 논란의 여지가 크다.
의료윤리학자들은 몇 가지 핵심 원칙을 강조한다.
첫째,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informed consent)가 필수적이다. 소크의 아들들은 5살, 6살, 9살이었다. 그들이 백신의 위험성과 이득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동의했다고 보기 어렵다. 부모의 권위에 의한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가족 구성원은 과학자인 가장에게 거절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특히 어린 자녀의 경우 진정한 의미의 자발적 선택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셋째, 위험과 이득의 균형이 합리적이어야 한다. 소크의 폴리오 백신은 당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던 질병을 예방할 수 있었다. 기대 이득이 매우 컸다. 하지만 만약 백신에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다면? 과학자 개인이 그 책임을 질 수 있었을까?
모든 일이 결과가 좋았다고 인정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의학적 여러 주제들이 지속적인 윤리논쟁을 일으키는 것도 비슷한 이유와 결정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고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모습을 무모하다고 비난할 수 만은 없다.
정답은 물론 없다.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의학 발견이 때로는 치명타를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을 안전하게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의견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며 글을 마치겠다.
다음에 백신을 맞을 때, 잠시 생각해보자. 이 작은 주사 한 방 뒤에는 자신의 몸을 실험실로 삼았던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오늘날 우리 모두를 더 안전하게 보호하는 윤리적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학의 미래는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견고한 윤리 위에 세워진 협력적 과학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