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다. 겨울이 지나간다. 겨울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는데 이 겨울의 끝자락에 기다리던 무언가는 나에게 도착했을까? 나는 한 해의 찌꺼기처럼 남아있는 묵은 감정들이 겨울의 추위와 함께 저절로 쓸려나가기를, 지난해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정리되길 바랐다.
1월 1일이 지났고 3월을 목전에 두는데도 내 바람과는 달리 지난 12월이 길게 늘어진 기분이 들었다. 제야의 종소리는커녕 북적거리는 연말 행사는 전부 도망다녔고, 새해를 맞아 일출을 보러 가기는커녕 여느 주말처럼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떼지 않았으니 어쩌면 해가 바뀌는 걸 기념하는 의식을 전부 피해 다닌 지독한 대가일지도 모르겠다. 정호승 시인의 시 한 구절처럼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아무래도 옳지 않았다. 늦었지만 나도 나름의 묵은 해를 보내는 의식을 치르고 새해의 기분을 내기로 했다.
그래서 천문대를 찾았다. 겨울철 별자리는 12월부터 2월 사이에 관측된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지난해의 겨울을 간직한 밤하늘이 내 마음이기라도 한 양 동질감을 느꼈다. 밤하늘이 봄의 별자리를 맞이하는 게 당연하듯 내 마음도 다음 단계로 자연스레 넘어갔으면 했다. 이제 곧 지나갈 겨울철 별자리를 눈에 담고 끈덕지게 늘어진 내 안의 겨울에게도 "끝!"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당일치기로 별을 볼 수 있는 천문대를 찾는 건 서울 뚜벅이에게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밤이 깊어야 모습을 드러내는 별들을 보고 나면 돌아오는 차편이 대부분 끊기기 때문이다.집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야 하지만 되도록이면 별빛이 바래지지 않도록 도심의 불빛과는 다소 떨어져 있길 기대하는 모순적인 바람 속에서 수도권의 어느 스페이스센터로 타협점을 찾았다.
영하 9도의 찬바람이 살을 에일 것 같은 주말 오후, 1시간이 넘는 전철 이동 끝에 구파발역에서 내려 또다시 택시를 타고 30여분을 달리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녁 7시 천문대 관람표를 끊고 케이블카를 타면 한참을 높이 올라가 어둠이 내린 산꼭대기 속 홀로 고고하게 자리 잡은 천문대에 내리게 된다. 이곳 1층에서 겨울철 별자리에 관한 5분 남짓한 짧은 설명을 듣고 망원경이 있는 옥상으로 오른다. 별을 보기 위해선 농도 짙은 어둠이 필요했기에 여기서부터는 핸드폰을 켤 수 없었다.
시야가 어둠에 적응하면 할수록 하늘 위에 더 많은 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체를 관측하는 망원경은 야외에 4대가 있고, 거대한 돔 안에도 망원경이 1대가 위치했다. 망원경들은 서로 다른 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총 5개의 별을 렌즈를 통해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돔 안에 있는 제일 큰 망원경은 밤하늘에 가장 밝은 별인 시리우스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안내해주는 직원분이 말하길 내가 지금 보는 시리우스의 별빛은 9년 전의 빛이라고 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빛이 내 눈에 닿기까지 수년이 걸리는 것이다. 과거에서 쏘아진 시리우스의 별빛에 9년 전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갓 입학한 대학교를 만화가가 되겠다며 그만두고 칩거한 지 막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동시에 성과없는 긴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학교의 문을 두드렸던 첫해이기도 했다.
저 별에 과거의 씁쓸한 패배감과 미래를 향한 불안감이 함께 일렁거렸다. 만약 과거에 나에게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 후로도 별일 없었다고. 9년 뒤 올려다볼 겨울 하늘 시리우스 별빛에도 지금의 내 모습이 겹쳐 질 것이다. 상상이 잘 안되는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볼까? 아무쪼록 그때의 나도 지난 날을 반추하며 별일 없었다고 말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별 관측이 모두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어플로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콜택시라도 잡힐까 전화번호 검색을 하던 중 그냥 1km 떨어진 버스 정류장까지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천문대에서 들은 별 이야기를 곱씹으며 밤하늘에 펼쳐진 별을 따라 내려오는 건 왠지 모르게 애틋하고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별을 보러 온 건 늦은 제야의 의식과 새해맞이 행사를 조용히 치르기에 꽤나괜찮았던 선택이었다.
그런 몽글몽글해지는 마음과는 다르게 내 발가락들은 영하 9도의 한파가 견디기 어려웠는지 점차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서울에선 쓸 데가 없어 짐만 된다며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에게 전부 보내드렸던 발바닥 핫팩들만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호들갑을 떨며 발이 동상에 걸렸을 경우 나타나는 증상에 관해 진지하게 검색해보려던 즈음 버스 정류장에 마침내 다다랐다.
구파발역을 향하는 막차에 오르며 별과 함께 했던 차디찬 밤과 이별할 준비를 마쳤다. 별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빛나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