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오늘을 종이 위에 새겨보는 날 | 필사하기

by 감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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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가을에 막 들어서 선선한 바람이 볼을 간지럽힌다. 여름 옷처럼 너무 얇지도 않고 겨울 옷처럼 너무 무겁지도 않은, 품은 넉넉하고 조금은 따스한 촉감의 부드러운 가디건을 걸치고 있는 요즘은 ‘잔잔하다’라는 단어에 가장 가까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시간이 좀 더 오래토록 그대로 멈춰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지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의 무게가 좋아 행복하다고 느낄 정도로 마음이 넉넉하다. 걱정은 떼어놓을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친구라, 그 존재감이 이렇게 희미해진 날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더욱 아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시간을 붙잡고 싶을 땐 조용히 색바랜 시집과 공책을 펴고 손에 익은 펜을 찾는다. 시 속의 정제된 단어들을 따라서 한 자, 한 자 공책 위에 다시 눌러 담다 보면 시간의 호흡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이 주위가 느리게 흘러간다고 믿었다.


나의 색바랜 시집의 저자는 박인환 시인이다. 국어 시간에 시기별로 나온 현대시 순서를 꾸역꾸역 외워야했던 세대인지라 후기 모더니즘 대표 시로 소개된 목마와 숙녀의 작가로 처음 알게됐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의 시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도 시 속의 단어들이 생소해서 비밀스러웠고 동시에 왠지 모르게 아름답게 느껴져 설렜던 기억이다. 박인환 시인의 다른 작품을 더 읽고 싶은 마음에 그의 시들을 엮은 시집을 참고서 사는 김에 같이 슬쩍 담았고 그것을 인연으로 그의 시집은 여전히 나의 책장 한 켠에 누렇게 세월을 머금고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첫 필사는 면접 합격을 통지받고 첫 근무일 전까지 남은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20대를 내내 좌불안석하게 만들었던 과제를 일단 해치우고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책장을 가득 채운 면접의 바이블, 토익 실전, 자격증 기출 등 꼴도 보기 싫은 제목의 수험책들을 모조리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찾아낸 것이 묵혀있던 박인환의 시집이었다. ‘왜 샀더라?’ 기억을 되짚어보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고등학생 시절 반했던 문장과 단어들에 다시 마음이 요동쳤다.


처음엔 그 단어들을 사랑한 나머지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잊지 않으려고 공책에 옮겨적었다. 그러나 아무리 꾹꾹 눌러 적는다 한들 내 것이 되기는커녕 손에 힘을 줄수록 글자들이 더 튕겨져나가는 것 같았다. 공책이 절반 정도 채워졌을 때야 비로소 시를 내 안에 들어오게 하려면 그저 시어를 적는 그 순간을 음미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볼펜의 잉크가 끈적하게 흰 종이에 흘러내려 얼룩이 글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어린이가 개미 떼를 관찰하듯 즐기면 그만이었다.


또 하나 시를 필사하면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작가가 시를 짓고 있었을 순간의 시곗바늘과 날씨와 공간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며 동기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긴 사연은 구름에 걸린 달 속에 묻히고 우리들은 여행을 떠난다>,<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로사리오해협에서 불어오는 처량한 바람을 잊으려 한다> 이 문장들이 탄생하는 날의 온도와 시간에 대해 상상하며, 간혹 그때와 지금의 온도와 시간이 일치하기를 바라기까지 하며 시공간이 공유된 공간에서 시를 짓는 양 따라 써보는 거다. 그러면 창밖으로 떨어지는 저 빗방울이 시인에게 영감을 주었던 빗방울과 같은 듯 특별해지고, 필사를 하다가 손에 드리운 볕뉘가 마리서사에서 시를 쓰던 작가에게 드리운 볕뉘와 같기라도 한 것처럼 홀로 낭만에 흠뻑 취해버린다.


그렇다면 글자들을 담을 종이는 어떤 게 좋을까? 나의 경우는 여유있는 날이 찾아올 때만 펜을 잡기에 일단 손에 쉽게 잡히는 이면지로 대충 시작했었다. 필사가 끝나면 쿨한 척 바로 종이를 폐지함에 버리고 순간에 충실했으면 그걸로 됐다고 믿었다. 어차피 전문가의 폰트로 예쁘게 편집된 시가 시집에 떡하니 인쇄되어 있는데 굳이 나의 투박한 날 것의 글씨체로 옮겨 적은 시를 간직한 들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책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건 필사하던 날의 내 그 엉성한 글씨가 그리워졌을 때다. 종이 위에 남은 글자들은 시를 따라쓰던 그 날의 한가로운 시간이 존재했음을 알리는 매개체나 다름 없었는데 재활용함에 들어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좋은 시절 찍어놓은 사진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그 후로 필사할 종이는 시간이 보관될 앨범이라 생각하고 신중히 골랐다. 마침 볼펜사랑단이었기에 만년필처럼 펜에 따라 맞는 종이 재질을 찾는데 큰 고민거리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하얀 백색용지보다는 누르스름한 미색지를, 매끈하게 포장된 코팅 용지 보다는 다소 거칠어 잉크를 묻혀내는 느낌이 살아나는 내지를 찾다가 지금은 재생지 제본 노트에 정착했다.


성질이 급해서 잉크가 빠르게 마르지 않는 걸 못 견뎌하는 편이라 펜중에서도 유성볼펜만 고집하는데 가끔 볼펜 똥이 뭉치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손으로 하는 일의 비규칙적인 특징을 뽐내는 것같아 귀여운 매력으로 다가온다. 부주의하게 손바닥으로 뭉친 잉크를 건드려 페이지 전체를 얼룩지게 하는 것만 주의한다면 말이다.

노트를 펴고 이번엔 ‘그날은 삼월 율리시스가 잠자듯이 나는 이 바다에서 잠든다’로 시작하는 시를 옮겨 적어본다. 알쏭달쏭하고 화려한 시구들이 시집을 넘어와 나의 공책을 한바닥 가득 채워나가면 붙잡고 싶었던 시간들은 종이에 묻은 잉크가 되어 자취를 남긴다.


다시 노트를 펴는 날, 내가 써 내려간 글씨들이 어느 때보다도 잔잔했던 오늘 하루를 전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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