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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또개 Dec 02. 2023

그거 제 사과입니다만

남편의 강박증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은 치킨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야채칸에서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감과 사과도 꺼냈다. 오늘의 점심이다.


이 계절엔 입속에서 물컹하게 터지는 홍시가 생각나지만 이곳에서는 홍시를 기대하기 쉽지 않다.

홍시가 그리운 날엔 마트로 달려가 딱딱한 감 속에서 그나마 단단함이 누그러진 아이들을 골라온다.

그러곤 이맘때 서늘한 냉장고 아래서 푹 자고 일어난 아이들을 꺼내 한국의 홍시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말캉해진 단감을 맛본다. 홍시를 반으로 갈라 양손 가득 묻히며 먹는 기쁨은 없지만, 단 맛이 감도는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행복은 누릴 수 있다.

올 가을은 한국에서 보낸 덕에 이러한 인고의 시간 없이 맛있는 홍시를 입안 가득 넣어 즐겼다.


그렇게 몇 주째 남편과 나는 감을 먹고 있다. 그러다 보였다. 남편의 포크가 어디로 먼저 향하는지.

나는 대체로 맛있는 음식을 먼저 먹고 그 후에 상대적으로 맛없는 음식으로 향한다.

치킨과 감과 사과가 있던 오늘, 남편의 포크는 먼저 사과로 향했고 나는 치킨으로 향했다.

떡과 감과 사과가 있던 어제는 남편의 포크는 떡으로 향했고 나 역시 떡을 먼저 집었다.

(남편 기준 가장 맛없는 떡, 내 기준 가장 맛있는 떡)

과일만 있으면 어떨까? 남편은 사과로 나는 감으로 먼저 향한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설탕, 소금, 식초, 간장 순으로 요리에도 순서가 있듯 달고 맛있는 음식을 먼저 먹어야지 입안 가득 맛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양념이 고루 밸 수 있도록 각 재료의 분자 크기로 요리법이 정해지는 거지만, 왠지 시큼한 사과 한입 베어 물면 나중에 단맛이 들어올 자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는 왜 항상 맛없는 거부터 먹어?"


"음.. 이건 급식과 관련이 있는데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식판 검사를 했거든?"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그래서 난 귤 나올 때가 가장 좋았어! 귤껍질에 남은 음식을 은폐할 수 있었거든."


"우린 귤껍질까지 다 검사했어. 그때부터 잔반이 나오면 안 된다는 강박이 생긴 거 같아.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아무튼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는데 마지막에 내 입속에 남겨진 게 맛없는 음식이면 그렇게 싫더라고. 그래서 항상 맛없는 거부터 처리하고 맛있는 걸 먹는 거지."


그제야 납득이 갔다.

남편은 메뉴에 샐러드가 나오면 샐러드부터 먹어치웠다.

신혼 초에는 항상 샐러드 그릇부터 바닥이 보여 난 그가 샐러드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더 수북이 줬고 당시엔 싫다는 말도 못 하고 꾸역꾸역 다 먹어줬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언젠가 그가 "사실 나 채소 싫어해"라는 말을 힘겹게 꺼냈을 땐 그동안 맛있어서 허겁지겁 달려든 게 아니라 사실은 공격적으로 먹어치우는 거였다는데 다소 충격이었다.

그리고 해가 거듭될수록 나의 젓가락질 또한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그러지 않으면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드리는 그의 흡입력으로 내 몫의 일부를 빼앗기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과 같이...


"그거 제 사과입니다만..."


겨우 두 쪽 남아있던 사과로 돌진하던 포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나 아직 사과 입에도 안 댔는데..."


"오모낫 미안해. 미안합니다"


남편은 남은 사과를 내밀며 내게 사과를 건넸다.

그리곤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본인은 매끼마다 먹어 치워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힘겹게 사투 중일지 모르지만, 그의 몸뚱이는 덕분에 고루 갖춘 영양소를 소화시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안쓰럽긴 해도 먹기 싫은 음식을 아얘 입에도 안 대는 것보다는 현란한 젓가락질이 나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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