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강의 게임 종족
20세기 말 컴퓨터 게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게임 중 하나인 ‘스타크래프트(StarCraft)’가 PC방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들썩이게 하던 시절, 새로운 직업을 가진 젊은 친구들이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우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칠 듯한 손놀림과 송곳 같은 판단력 그리고 기상천외한 전략으로 모니터 저 너머에 펼쳐진 전장을 지배하는 그들을 우리는 ‘프로게이머’라고 불렀다. 인류 최강 게임 종족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광안리 대첩’과 ‘임진록’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임요환, 홍진호는 당시 그 여느 연예인보다도 더 인기가 있던 스타였다. 게이머들은 기꺼이 그들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지갑을 열었다. 고작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는 두 젊은이들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게임리그의 결승전에 10만 명의 관객을 모객 할 수 있던 그 에너지는 눈덩이처럼 계속 불어나서 지구상 인류의 9.4%(7억4천7백만)를 시청자로 만드는 폭발력을 발현하고 있으며 심지어 매년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 게임에 최적화된 민족이라는 것을 각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로게이머의 길을 걷고자 결심하고 왕좌에 도전하는 젊은 친구들이 하나둘 많아졌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e스포츠의 종주국’으로 전 세계 게이머들에게 암묵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넘볼 수 없는 실력으로 전 세계 e스포츠 리그를 주름잡으며 여느 프로스포츠 선수들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유명 다큐멘터리 제작사인 내셔널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에서는 한국의 e스포츠 선수들은 유전적으로 월등한 능력을 타고났다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인류 최강의 게임 종족이다.
e스포츠의 종주국
대한민국을 e스포츠의 종주국이라고 우리 스스로 자부한다. 물론 그에 대해 누구도 이견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e스포츠의 시작은 게임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그 첫 발걸음을 찾아볼 수 있다. 1972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당시 인기 있었던 게임 ‘스페이스 워!(Space War!)’의 대회를 개최했다. ‘Intergalactic Spacewar Olympics’라는 타이틀의 게임대회에 24명의 대학원생이 참여하면서 컴퓨터 게임을 이용한 최초의 이벤트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1980년에는 거대 게임개발사 ‘아타리(Atari)’에서 자사의 글로벌 히트작인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의 대회를 개최하였고 10,000명이 넘는 참가자가 참여한 ‘Space Invaders Championship’은 당시 TV로 방송되었다. 1990년에는 ‘Nintendo World Championship’이 미국 전역 29개 도시에 걸쳐 개최되었고 1997년에는 ‘CPL(CyberAthlete Professional League)’가 출범했다.
프로게이머라는 직군이 생겨난 곳도 미국이 최초였다. 퀘이크(Quake)의 개발사 ‘이드소프트(id soft)에서 총상금 8,500달러 규모의 토너먼트 대회를 개최했고 우승자인 ‘트래쉬 퐁(본명: 方鏞欽)’을 당시 해외 언론 여러 곳에서 최초의 프로게이머로 소개했다.
그렇다. e스포츠의 시작은 한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 e스포츠의 종주국이라는 위상을 얻게 된 것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도 모두 대한민국의 위대한 e스포츠 선수들 때문이다. 가장 인지도 있는 e스포츠 저널리스트인 ‘쏘린(Thorin)’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한국인은 어떤 e스포츠 게임도 지배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명 ‘쏘린의 사색’이라 알려진 이 영상은 삽시간에 전 세계 e스포츠 팬들에게 퍼져 나갔고 ‘한국인은 왜 게임을 잘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유명해졌다.
문제는 없나?
지난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시범종목으로 개최된 e스포츠에 대한민국은 2종목 대표선수를 출전시켰다. 스타크래프트2는 금메달을 리그오브레전드(LoL)은 은메달을 차지했다. 당연히 두 종목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 것이라 예상했으나 전 세계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 ‘Faker(이상혁)’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중국대표팀에 석패하고 말았다. 또한, 2021 롤드컵(LoL world cup)’의 소환사 컵은 전통적 강호 LCK(League of Legends Champions Korea)의 팀들을 누르고 중국의 ‘EDG(Edward Gaming)’가 쟁취했다. 물론 EDG에도 ‘Scout(이예찬)’과 ‘Viper(박도현)’ 등 한국의 최정상급 선수들이 한국팀에서 이적하여 핵심전력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4강전에서 3팀이 LCK 팀이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결과에 대해 단지 운이 없었다는 식으로 위로하고 정리해야 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언제까지 우리가 e스포츠의 종주국으로 그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중국은 이미 오래전 e스포츠를 국기로 설정하고 막대한 예산과 정책지원을 통해 e스포츠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도시마다 대규모 e스포츠 전용 경기장을 건설하고 대학에 e스포츠 학과를 개설하고 있으며 e스포츠 전문 직군에 대한 국가공인자격증 시험을 치르고 있다.
미국의 상황도 중국과 다르지 않다. 미국은 전통 스포츠와 동일한 에코시스템을 갖춰가며 완벽하게 프로스포츠의 형태로 자릴 잡고 있다. 대학 스포츠로 기존의 다른 인기 전통 스포츠를 서서히 대체해가는 상황이며 조심스럽게 미국 대학 스포츠의 꽃이라 불리는 미식축구를 넘어설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이미 e스포츠 선수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는 대학이 300개 이상으로 확대되어 대학진학이 가능한 기존의 전통 스포츠들과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초·중·고교에서는 e스포츠가 기존의 STEM(창의융합인재교육, 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ematics) 교육과 결합하여 훌륭한 과외활동 프로그램으로 보급되며 학교 내 e스포츠 클럽의 형태로 학생들에게 e스포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e스포츠 산업에서 요구되는 전문 직군에 대한 진로체험 프로그램으로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미국이나 중국의 사례에 비해 우리는 e스포츠 산업을 발전시키는 현안에 너무도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다. 대한민국 e스포츠의 근원적인 힘은 뛰어난 선수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이는 e스포츠 산업에 관련된 전문가들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으며, 해외에서도 한국이 어떻게 훌륭한 e스포츠 선수를 키워내는지 너무나 궁금해하고 있다. 마치 특별한 훈련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어서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들을 계속해서 키워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일반적으로 전통적 프로스포츠의 선수구성은 피라미드 형태의 안정적인 구조로 각 단계에서 필요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며 선수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구축되어 있다. 특히, 전통적인 인기 종목들은 제도권 내에서 모든 과정들이 이뤄지기 때문에 아이들을 특정 스포츠의 프로선수로 키우기 위해서는 우수한 팀을 보유하고 있는 학교로 진학시켜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소수의 슈퍼 플레이어를 제외하고는 단계적, 체계적인 선수 풀을 구축하지 못한 채 스스로 대단한 선수로 성장한 플레이어들을 찾아내는 방법들을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프로구단을 중심으로 자체적인 아카데미를 설치하고 선수를 양성하고 있으며 한국e스포츠협회(KeSPA)와 지자체를 중심으로 선수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나 이 역시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선수양성 파이프라인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미미한 상황이다. 이런 토양에서 언제까지 글로벌 무대를 주름잡는 선수를 키워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다.
학교를 떠나야 하는 선수지망생들
대한민국 e스포츠 프로선수들의 평균연령은 21.6세이다. 그중 미성년(14세~19세)이 22.4%로 10명 중 3명이 성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선수들은 어디에 소속되어서 어떻게 선수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국내에 e스포츠 팀을 구축하고 운영하고 있는 고등학교는 단 두 곳밖에 없다. 아현정보산업고등학교와 은평메디텍고등학교가 e스포츠 학과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연히 중학생 레벨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e스포츠 팀을 보유하고 있는 학교를 찾아볼 수 없다. 한 마디로 제도권 교육시스템 내부에서 e스포츠 선수로 활동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대학 e스포츠 생태계가 교내 동아리 수준의 아마추어 단계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대학에 진학해서 선수 활동을 지속할 수도 없다. 현실적으로 e스포츠 선수가 되기를 희망하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낼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프로스포츠 선수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명문구단이 있는, 전통 있는 학교로 진학하는 타 전통 스포츠와는 정반대의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재능 있는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좇아 학교를 떠난다. 그리고 몇몇 2부리그의 팀에 소속되어 활동하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아이들은 PC방을 근거지로 자신들만의 팀을 구성하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는 험난한 진로를 선택하고 있다.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학교를 떠나지 않고는 프로선수가 될 수 없는 현재 대한민국 e스포츠 선수양성 파이프라인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제도권 교육과 격리될 수밖에 없는 이러한 문제 때문에 다양한 경험과 기초소양을 익혀야 할 나이의 아이들이 최소한의 교육도 받지 못한 채 냉혹한 승부의 세계로 던져지는 현실은 대한민국 e스포츠 산업의 미래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매우 심각한 위험요인이다. 전통 스포츠와 동일 선상에 놓고 고려해보면 단순히 운동능력만 뛰어나다고 해서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 인성과 철학은 물론 올바른 가치관과 스포츠맨십이 정립되어야 하며, 글로벌 무대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외국어 등 다양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학교를 떠난 아이들은 그런 준비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조차 제공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선수지망생의 길을 걷는 수 많은 아이들이 프로선수라는 극소수만 쟁취할 수 있는 타이틀을 얻지 못했을 경우 과연 '플랜B를 준비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에만 몰두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구단이나 팀의 관계자 혹은 주변의 그 누구도 은퇴한 이후의 삶에 대해 조언을 해주지 않는다. 아무도 그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는다. ‘잘되면 PC방 사장이고 못되면 PC방 알바’라는 그들 사이의 씁쓸한 농담이 결코 농담이 아닌 현실임을 우리는 가볍게 지나쳐서는 절대 안 된다. 프로선수가 되지 못하는 대다수의 e스포츠 선수지망생들을 우리 기성세대는 과연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해결책은 있나?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e스포츠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지원정책을 마련하고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다만 문체부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발전정책만으로는 앞서 언급한 현안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지역마다 건설되고 있는 전용 경기장과 때마다 개최되는 아마추어 대회들이 우수한 선수들을 안정적으로 키워내는 산업발전의 근간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 현역 선수들뿐 아니라 선수가 되고 싶어 하는 지망생들의 밝은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줄 수 없다.
교육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MZ세대의 97%가 e스포츠를 하거나 본다는 통계자료가 있다. 게임콘텐츠가 청소년들의 바람직한 성장에 해악의 요소로 작용하고 폭력성을 키운다는 검증되지 않은 선입견을 근거로 이미 문화가 되어버린 청소년들의 e스포츠 활동을 배척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e스포츠 문화를 더욱 연구하고 발전시켜서 긍정적 요소를 극대화하고 교육 프로그램화하는 것이 현실적인 접근 방법이다. 게이미피케이션이라는 개념으로 교실 속으로 게임콘텐츠를 끌어들인 것처럼 학교 안에서 e스포츠를 배우고 즐기고 만들 수 있게 해야 한다. 선수지망생들도 최소한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연습실이나 PC방이 아닌 학교 안 e스포츠 클럽에서 혹은 학교팀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스포츠 선수만을 키울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에 따라 e스포츠 산업에서 일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키워낼 수 있도록 진로체험의 기회를 교내 e스포츠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줘야 한다. 제도권 교육 내에서 이뤄지는 e스포츠 교육은 기존의 전통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선수지망생과 선수 그리고 은퇴선수들의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의 건강한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 이것이 교육부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e스포츠는 스포츠와 문화의 범주를 넘어서 교육 분야까지 폭넓게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e스포츠 교육의 제도권화가 대한민국 e스포츠 생태계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키가 될 것이다.
글
서강대학교 게임교육원 교수
2021년 게임문화포럼 투고분과 위원
2006.09~현재 서강대학교 게임교육원 교수
2019.11~현재 게임물관리위원회 등급재분류위원
2021.06~현재 성남시e스포츠진흥위원회 부위원장
2013.11~2015.10 중국연변대학교 미술대학 초빙교수
2014.06~2015.07 영국IDEA Fabric. HeroEngine 교육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