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포츠와 테크놀로지의 흥미진진한 공진화
이스포츠와 테크놀로지의 필연적인 공진화
이스포츠는 글로벌적 규모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영역 중 하나로 현대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테크노컬처로 자리 잡고 있다. 이스포츠가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이스포츠가 늘 기대한 것 이상으로 새롭고 신비로운 경험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아직도 이스포츠를 게임이라는 가상공간에서 펼쳐지는 스포츠라는 의미에서 ‘전자(electronic)’ 스포츠인 “e스포츠”로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스포츠의 하나의 면모일 뿐, 현재의 이스포츠라는 존재를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고 제약적이다. 이스포츠는 지난 10여 년의 기간 동안 게임이나, 관람 스포츠를 넘어서는 그 무언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수사 어구를 제외한 고유명사로 “이스포츠”라 부르자고, 그래서 그 자체로 보자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하나의 인공생명체의 경이로운 성장을 지켜보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스포츠를 바라보고 싶다.
이토록 이스포츠가 늘 혁신적인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이스포츠와 테크놀로지와의 긴밀한 관계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스포츠가 기반하고 있는 게임이라는 매체 자체가 테크놀로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이스포츠는 그 풀뿌리에서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그 어떤 분야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빠르게 내부화해서 활용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글로벌 규모에서 실시간으로 상호 연결된 기술계가 요동치는 현대 사회에서, 테크놀로지의 변혁과 함께 같이 발전해 온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스포츠와 테크놀로지의 상호 협력적인 공진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풀뿌리의 열망에서 탄생한, 테크놀로지를 향한 이스포츠 커뮤니티의 DIY 기풍
이스포츠의 기원을 쫓아가 보자면, 1972년 10월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개최되었던 ‘<스페이스 워> 올림픽(Intergalactic Spacewar Olympics)’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 함께 모여서 게임을 즐기고 싶었던 게이머들의 열망은 퍼스널 컴퓨터의 초기부터 뜨거웠다. 이러한 열망이 모여 1990년대부터는 LAN 파티인 드림핵이 개최되었고, 게이머들은 자신의 컴퓨터를 싣고 장거리를 운전해 한곳에 모여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충분하지 않았다. 게이머들은 뛰어난 플레이를 계속 보고 싶었고, 또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
알다시피, 텔레비전과 같은 레거시 미디어는 게임을 중계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지 않았는데, 결국 게이머들은 스스로 방법을 연구해야 했다. 당시의 시도 중 아직도 회자되는 방법중의 하나는, 윈앰프, 샤웃캐스트 등과 같은 오디오, 라디오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중계 음성을 녹음하거나 중계하고, 화면은 게임 서버에 접속해서 관전하거나 동영상을 별도로 다운받아서 두 파일의 시간을 맞춰서 플레이하는 방식이다. 많은 이들이 이스포츠 중계진을 타 스포츠와 다르게 ‘샤웃캐스터(Shoutcaster)’라고 부르는 이유가 소리를 질러서 인줄 알지만, 사실은 이때 사용하던 소프트웨어에서 나온 명칭이다. 이러한 풀뿌리 커뮤니티의 ‘DIY(Do it yourself)’ 기풍은 현재까지도 이스포츠 씬의 곳곳의 문화적 수행에서 지속해서 살아 숨 쉰다.
텔레비전 미디어 테크놀로지와의 만남: 이스포츠 미적 양식(aesthetic)의 탄생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스포츠는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비웃음거리로 다뤄질 정도로 진지한 대상으로 취급받지 못했는데, 일찍이 레거시 미디어에서 이스포츠를 품어준 유일한 나라가 있다. 바로 한국이다. 200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OGN, MBC게임 등 게임 전문 채널들이 설립되면서, 케이블TV에서 이스포츠가 중계되기 시작했다.
방송 프로그램으로서 게임 리그가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구축되어야 했기에, 전형적인 스포츠 중계의 방송 포맷에 가깝게 콘텐츠가 구성되었고, 이스포츠 커뮤니티에서 주목하는 ‘타이틀’ 영상 등의 전통도 이 시기 생겨났다. 또한, 방송 시스템과 적합한 수준으로 기능하기 위해 게임의 관전 모드 기능 등도 많은 업데이트를 거쳤다. 즉, 이 시기 이스포츠는 텔레비전 방송 테크놀로지의 요소들 및 생산 양식과 정합성을 맞추는 구체화를 통해 진화했다.
초기 이스포츠는 풀뿌리 문화의 DIY 기풍과 여러 실험적인 시도에 기반하여, 게임의 유형이나 특정 대회나 리그의 기획에 따라 각 게임 커뮤니티 내에서의 관례 등 “서로 다른 전통을 환영”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표준 ‘이스포츠 미적 양식’이 존재하지 않았다(Taylor, 2018, p.152). 하지만, 한국에서의 이러한 구체적인 발전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스포츠의 양식 정립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모바일 & 디지털 테크놀로지 시대로의 진입: 이스포츠 문화 수행의 경계(Boundary) 해체
스마트폰의 보급, 네트워크 테크놀로지의 발전, 그리고 무엇보다 라이브 스트리밍 플랫폼의 등장과 함께 이스포츠는 다시 진화한다. 이때부터 이스포츠의 무대는 점차 디지털 공간으로 이동하고, 이스포츠를 즐기고 소비하는 방식의 여러 경계가 해체되었다.
트위치TV, 유튜브와 같은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서 전 세계의 리그를 실시간으로 혹은 원하는 시간에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복잡한 방송 시설이 없이도 누구나 손쉽게 이스포츠 대회를 열고 중계할 수도 있었다. 또한, 이러한 플랫폼에서의 시청은 더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게임 같은 경험으로 변화했다. 여러 피드로 제공되는 화면 중 원하는 화면을 선택해서 시청할 수 있었고, 경기 중에 투표에 참여하거나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도 있었다. 나아가, 프로게이머 선수들이 직접 스트리밍을 하면서 팬과 선수들은 더욱 가깝게 소통하게 되었으며, 팬들도 유튜버나 스트리머로 성장하면서 이스포츠 생태계는 생산과 수용의 명확한 경계 없이 하나의 통합적인 생산 공동체가 되어갔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영속적인 확장 가능성’과 결합하며 더욱 확장하는 이스포츠의 표상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지속적인 공진화는 기존의 스포츠 중계라는 매체 고정적 양식에서 이스포츠를 더욱 자유롭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방송 시스템의 소프트웨어화, 자동화, 그리고 클라우드 시스템 등의 발전은 사건이 발생하는 공간의 현장감에 중점을 주던 이전 중계의 기준에서 벗어나, 기존 사회의 관념적·지정학적 경계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이스포츠 양식을 이끌었다.
발전된 제작 테크놀로지와 함께, ‘글로벌에서 로컬로 이동하는 첫 산업’이었던 이스포츠의 명성에 걸맞은 전 세계를 포괄하는 표상이 가능해졌다. 라이엇 게임즈의 2020년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챔피언십에서는 실제 경기가 펼쳐지는 중국 상하이 외에도 수많은 공간이 등장했다. 경기 전 프리쇼와 분석은 유럽 LEC의 베를린 스튜디오, XR 가상도시로 구현된 경기장, 중계를 맡은 한국 LCK 캐스터들이 있는 롤파크, <리그 오브 레전드>의 소환사의 협곡 맵, 그리고 중국 현지의 조 추점 무대와 그 상황을 설명하는 미국 LCS 중계진의 집의 공간이 표상된다. 전 세계와 가상공간이 하루의 이스포츠 속에 실시간으로 공존한다.
그뿐만 아니라 첨단 테크놀로지를 통해 이스포츠 무대는 미디어 엔터테인먼트와의 융합을 통한 스펙터클을 생산한다. 게임 내 캐릭터들이 결성한 K-POP 그룹이 AR로 구현되어 무대 위에서 공연을 펼치거나, 애니메이션 속의 공간에서 이스포츠 주제가를 열창하는 아티스트의 공연을 구현한다.
실제 환경과 인-게임이라는 가상의 공간 사이에 수없이 많은 층위들이 추가되고, 시퀀스들은 중첩된 혼합현실에서 교차하는 방식으로 변모하며, 이스포츠는 현실-가상 연속체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 사이 공간에서 자신만의 크로노토프(Chronotope)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제4의 벽, 그 너머에는?
‘제4의 벽(The 4th Wall)’은 연극에서 무대와 객석 사이, 혹은 영화에서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벽을 뜻한다. 현장 관람 스포츠로, 또 텔레비전 관전 스포츠로 시작된 초기 이스포츠에서는 제4의 벽이 존재했을지 모르지만, 테크놀로지와의 공진화 과정에서 그 벽은 무너졌다. 나아가, 게임 속 공간과 현실 세계 사이의 개념적 경계, 지정학적 경계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실시간 연결된 커뮤니티와 새로운 혼합현실을 창조해 내는 이스포츠 속에 점점 흐려진다. 아마도 이스포츠는 앞으로도 블록체인, 탈중앙화된 디지털 소유권 등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부지불식간에 내부화해버리면서 또 그 상이한 ‘상(phase)’을 우리에게 드러낼 것이고 그 너머의 벽들에도 도전할지도 모른다. 그 여정을 함께하며 지켜보는 우리에게는 예측 불가했던 스펙터클을 선물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쉼 없이 유동적인, 또 매체나 내용에 고정되지 않은 문화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마주하는 현대 디지털 시대도 테크노컬처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스포츠는 우리에게 미래를 어느 영역보다 먼저 보여주는 특수하고도, 흥미로운 분야가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Bräysy, A., & Arkö, A. (2017). Fourth Wall Manipulation in Digital Games and its Impact on the Gameplay Experience.
Taylor, T. L. (2018). Watch me play : Twitch and the rise of game live streaming. Princeton University Press.
글
연세대학교 게임&이스포츠 기술문화 연구자
2021년 게임문화포럼 투고분과 위원
2015년~현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문화연구 박사과정
2019년~현재 Esports Research Network 멤버
2020년~현재 게임문화포럼 전문위원
2019년~2021년 라이엇게임즈 Esports Global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