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교육에 활용해야 하는 이유
시장원리에 가려진 배움의 원리
오늘날 자본주의는 단지 경제체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 인간관에 큰 영향을 끼치는 제도다. 자본주의는 점점 더 고도화되면서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 부작용도 많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반드시 변화가 필요한 분야도 있다. 바로 교육이다. 배움의 원리는 자본주의 시장원리와는 상극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츠루는 '시간성'이란 키워드로 배움의 원리와 시장원리의 차이를 설명한다.
배움이란 자기가 배운 것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주체를 구축해 가는 생성 과정이다. 공부를 끝낸 시점이 되어야 비로소 무엇을 배웠는지를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공부는 이런 역동적인 과정이다. 배우기 전과 배우고 난 후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 않으면 공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p.180)
플라톤의 <메논>에서 소크라테스는 '문제의 패러독스'를 말했다. 우리는 문제를 내고 그에 답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하지만 '문제'라는 걸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문제 자체가 역설적이다. 해법을 전혀 알 수 없는 문제는 애당초 '문제'로 의식할 수 없으며, 해법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문제'라고 부르는 것은 해법을 어렴풋이 알지만 아직은 완전히 알지 못하는 문제를 말한다.
과학은 항상 '가설'을 세운 다음 이를 증명한다. 가설을 세워서 이를 근거로 실험을 하고 반증 사례를 발견하면 가설을 바꾼다. 이것이 자연과학, 인문과학을 불문하고 모든 과학적 사고의 기본이다. '가설'이 지금 말한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아직은 완전히 알지 못하는 해법'이다. '임시 진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 임시 진리가 결정적인 진리인지 아닌지는 좀 더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 맞는지 안 맞는지 여부를 말할 수 없지만 시간을 들이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미지에 대한 지성의 개방성, 내가 이대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가질 수 있는 앎에 대한 분명한 기대가 '멘토', '문제', '가설'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추상적인 설명이라서 유감이지만, 여기서도 키워드는 '시간'이다.(p.184)
지성이란 요컨대 나 자신을 시간의 흐름 속에 놓고 나의 변화를 고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역으로 하면, '무지'도 정의할 수 있다. 무지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 자신 역시 변화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하는 사고를 뜻한다.(p.185)
「하류 지향」, 우치다 다츠루 / 박순분(역), 열음사
뭘 배울지를 전혀 모른다면 애초에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뭘 배울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인터넷 검색 한 번으로 알게 되는 것은 굳이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고 '우주 3대 난제'같이, 시간을 아무리 들여도 풀기 어려운 것은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배움은 어렴풋하게 알지만 완전히는 모를 때, 내가 어느 정도의 시간을 쓰면 배우게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할 때 성립한다. 그런데 시장원리는 다르다. 구매할 물건의 가치와 내가 부담하는 비용이 거의 일치한다고 판단할 때, 즉 문제(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답(나는 이게 필요하다)을 알고 있을 때 시작한다. 그리고 그 효과를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가급적 짧아야 한다.
"나는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상품만을 적정한 대가를 주고 구입하겠다"고 소비주체로서의 아이들은 이렇게 소리 높여 선언하면서 학교에 올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조용히 수업을 들을 턱이 없다. 배움은 시장 원리를 기초로 삼을 수 없다. (p.70)
소비자는 구매할 상품의 내역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구매할 상품을 어디에 쓸지 모르고서 상품을 구매할 사람은 없다. 소비자로서 교육기관에 맞서려면 그 전제로 지원자와 부모들은 대학이 어떤 쓸모가 있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p.177)
학교 교육에서는 아이들의 '고역(공부)'과 부모의 '투자(학비)'가 '화폐'에 해당하고, 아이들이 졸업 시에 받을 자격과 지식과 기술 그리고 장차 가져올 사회적 위신과 수입이 '상품'에 해당한다. 때문에 소비자 마인드로 교육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화폐가 투입되어 상품이 교부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가급적 짧기를 바란다. 이상적으로는 이 시간차를 제로로 하고 싶다.
소비자는 그런 법이다. 돈을 냈는데 상품이 손에 들어오지 않으면 소비자는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상품을 먼저 받고 돈은 나중에 지불하는 통판방식이(품질에 비해 값이 비싸더라도) 끈질기게 인기를 끌고 있는 까닭은 통판방식이 이상적인 무시간 교환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 마인드는 등가교환을 희망하고, 등가교환은 무시간 모델이기 때문에 고등교육장에서도 아이들은 '공부'할 동기가 사라진다. '시간'을 배제한 곳에 '배움'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p.179~180)
「하류 지향」, 우치다 다츠루 / 박순분(역), 열음사
'시간성'을 배울 수 있는 청소년들은 의외로 거의 없다.
앞서 살펴봤듯이, 배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나아질 수 있다는 '시간성'을 체득해야 한다. 머리로 이해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경험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교육 상황에서 과연 청소년들이 '시간성'을 경험할 기회가 언제 있을지 모르겠다. 가장 배움이 일어나기 좋은 대상은 교과공부이다. 시간을 쓰면 쓸수록 지식이 늘어난다. 시간성을 익히기에 매우 좋은 모델이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청소년기에 꼭 배워야 하는 내용들을 편찬해 놨을 뿐만 아니라 자격을 갖춘 교사들이 열심히 수업한다.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입시를 위한 줄 세우기 평가가 모든 것을 망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과 공부는 목적이 아니라 철저하게 수단이다. 내신등급과 입시 결과에 따라 배움의 성패가 결정 난다.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의 차이는 시험 본 다음에 잊어버린 학생과 시험 보기 전에 잊어버린 학생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1는 말이 너무 딱 들어맞아 웃프다(웃기면서 슬프다). 결과적으로 청소년들 중에 교과 공부를 통해 '배웠다'라고 할 수 있는 학생은 입시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기회는 없을까? 시간성을 배우기 좋은 또 다른 기회는 문화예술교육이다.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실력과 숙련도가 향상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공을 준비하는 학생이 아니라면 열심히 하는 게 권장되지 않는다. 입시에 포커스에 맞춰져 있는 학교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중학교 자유학기제에서 그나마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단기 체험에 그치는 게 아쉽다.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은 일본 학교의 부활동이다. 슬램덩크를 대표로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그 시스템이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과장하여 표현한 게 있겠지만, 일본은 청소년시기부터 일상적으로 생활체육과 문화예술 활동을 권장하고 있다.
'시간성'을 체득할 수 있는 대안, 게임
교과 공부, 문화예술교육은 배움의 좋은 소재지만 입시와 진로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순간 배움을 얻기 어려워진다. 당연한 얘기지만, 배움은 배우려고 할 때 가능하다. 자발적일 때 가장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이 가장 자발적으로 하는 게 무엇일까? <2022 국민여가활동조사> 통계에 따르면, 15-19세 청소년들이 '1년 동안 가장 많이 참여한 여가활동 (복수응답)'으로는 1위가 모바일 콘텐츠/ VOD 시청(64.2%) 2위가 게임(50.2%)이었다. 모바일 콘텐츠/VOD 시청이 휴식의 의미라면, 청소년들에게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취미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른으로서 청소년들이 보다 활동적이고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청소년시기는 친구들하고 노는 게 가장 좋고, 재밌게 놀 수 있는 대표적인 놀이는 게임일 것이다. 어른들 뜻대로 취미를 정해줄 수는 없다.
오랜 시간 동안 게임은 청소년에게는 좋은 친구지만 학부모들에게는 골칫덩어리였다. 이 갈등은 수많은 가정에서는 여전할 것이다. 하지만 기술발전과 게임 산업이 커지면서 게임에 대한 인식과 활용이 달라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게임 또는 게임적 사고나 방법을 교육에서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나 또한 이런 사람 중 한 명이다. 특히 나는 게임이 '시간성'을 체득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빌드업이 길었다. 그동안 교육 현장에서 시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게임을 교육적으로 활용할 때의 한계와 가능성을 짚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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