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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국퀴어 Aug 09. 2022

2014년 첫 퀴퍼, 그리고 2년 뒤엔 자원활동가

조재

역시나 늦어서 죄송하다는 사과문을 시작으로 저의 퀴어문화축제 참여 연대기를 이어갑니다.



2014년, 생애 첫 퀴어문화축제

2014년은 굉장했다. 무엇이 굉장했는가! 그 해는 바로 혐오 세력이 길바닥에 드러누워 퍼레이드를 방해하는 바람에 밤 11시가 넘어서야 끝났던 무지막지한 신촌 퀴퍼 때였다. 근데 나는 그때 처음으로 퀴어문화축제라는 델 가봤다. 2014년이니까 커밍아웃을 거의 하지 않은 예민한 아기 고라니 같은 때였는데 그 광경을 목도한 것이다. 사실 퍼레이드에 참여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정말 겁이 많아서 신촌에 가서 부스 구경만 깔짝깔짝하다가 신촌 주변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자리를 떠버렸기 때문이다. 친구와 저녁까지 먹고 헤어졌는데 사람들이 그대로 멈춰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을 그 신촌 거리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차가 끊기기 전에 빨리 강원도로 돌아갔다. (젠장)


2016년, 갑자기 자원활동가를

그로부터 2년 뒤 2016년 퀴어문화축제의 자원활동가를 지원하게 된다. (좀 극단적인 편) 2년 사이에 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건 나의 지난 글을 잘 찾아보면 알 수 있다.) 한창 여기저기 커밍아웃하던 시기에 어디를 가야 퀴어 친구들을 만들 수 있는지 몰랐던 내가 선택한 노선이 바로 퀴퍼 자활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혼자 지원하기는 좀 그랬다. 다음카페에서 함께 자활을 지원할 사람을 구했다. 마침 동갑내기였던 그는 안타깝게도 부산 사람이었다. 퀴퍼 사전 교육 때 새벽같이 일어나 KTX를 타고 서울에 왔던 그는 교육 후 자활 포기선언을 하게 된다. 퀴퍼 당일 새벽같이 자활 활동을 하려면 전날 서울에서 묵어야만 일정 소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퀴퍼가 끝나고도 하루를 서울에서 묵어야 했으니, 퀴퍼 하루를 위해 그는 2박 3일을 서울에서 보내야 하는 셈이었다. 강원도 사람인 내 일정도 만만치 않았지만 부산인에 비할 데는 아니었다.


그렇게 선두에서 커다란 플래그를 사람들과 함께 맞잡고 첫 퍼레이드를 마치게 된다. 트럭과 바로 붙어서 이동해서 참 신나고 뻐렁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그때 퀴어들이 트위터라는 SNS를 많이 사용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트위터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걸 지원하게 됐냐고 다른 자활 여러분들이 물었다. 그러게요. (…) 트위터도 모르고 그렇게 살았네. 자활 사람들과 계속 연락을 지속하고 싶어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지만, 잘 써먹을 줄 몰라서 금방 그만두게 되었다. 아무튼 그날 퀴퍼가 끝나고 뒤풀이는 새빛둥둥섬인지 뭐시긴지에서 이루어졌는데, 집에 돌아갈 차를 놓친 나는 홍대에서 2차, 3차를 가게 됐고 처음으로 엔제리너스에서 첫 차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정말정말정말 힘들었다.


2016년, 대구 퀴퍼도 갔다.

한술 더 떠서 2016년엔 대구 퀴어문화축제도 다녀왔다. 이때는 다른 동료들이 함께 자리했다. 서울 퀴어문화축제에서 사운드 빵빵한 혐오 세력을 만나서인지 걱정했던 것에 비해 혐오 세력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또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때 부산인 친구를 함께 보았다면 좋았으련만, 스케쥴이 맞지 않아 그를 만날 순 없었다.



분량조절 실패로 지난한 이야기가 다음화에도 이어집니다.

(사실 저의 정제된 퀴퍼 연대기는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만, 지방이라는 키워드에 맞춰 다시 써보았어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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