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관심이 잔소리가 된 우리들에게
“6•25 사변 지날 때 내 나이 스물 안 묵었다. 피난 간다고 억지로 짐 울러 매고 다니는데 비행기가 슁 하고 지나가면 두두두둥 소리가 어찌 시끄러운지...”
“워... 말로만 듣던... 울 할매 대단하네!”
“뭐라카노! 이기 뭐 대단한 기고! 너거는 일본 순사가 을매나 무서운지 모르제! 땅 파가 몰래 숨겨둔 곡식까지 다 빼가고! 걸리면 손톱도 빼가고 그캤다!”
“어우.. 그래도 울 할매 손은 참 곱네요. ”
“맞나 그 소린 많이 들었다 허허허”
감자네 집엔 살아있는 역사, 한국 나이 90이 훌쩍 넘은 할머니가 계신다. 1932년생 우리 할머니는 5남매를 홀로 키워오셨다. 우리 아버지가 할머니 나이 40에 태어나신 터, 자연히 나와 할머니의 나이 차이는 70살 정도다.
하루 한 번씩은 꼭 할머니와 마주 앉아 이야길 나누는데, 내가 절대 겪어볼 수 없을 백 년 전 이야기들을 공유해주시곤 한다. 피난길 이야기부터 벼농사 이야기, 일본 순사 이야기, 배 굶은 이야기 등등 나열하기도 벅찬 옛날이야기들을 마치 어제 일처럼 말씀해 주신다.
할머니와 이야기도 나누고 농담도 주고 받으며 누구보다 친하게 할머니와 잘 지내고 있지만, 그런 할머니에게 짜증이 확! 솟구치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밥 뭇나?"라는 말씀을 하실 때이다.
그저 인사정도로 하는 우리들의 말과 다르게 그냥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안 먹었으면 왜 안 먹었냐며 계속해서 추궁하시고, 조금 덜 먹는 것 같으면 남자가 그것밖에 못 먹냐며 나무라신다. 어쩌다 외식하고 들어가는 날엔, 바깥 음식은 방부제가 많아서... 아침마당에서 말하길 밀가루 음식은... 모두 사랑에서 나오는 말씀이지만 매일같이 듣게 되니 가끔은 과분할 때가 있다.
피난길에 오르며 들에 피는 아무 풀이나 꺾어 먹고, 치마에 적셔 굳어둔 쌀미음을 녹여 먹던. 밥 먹는 일이 귀한 때를 지내오신 할머니 입장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기에, 할머니의 말씀을 진심 어리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 않을까.
우리의 뿌리
소방관 시험에 최종 합격하고 가장 처음 한 일은 서울에 방문한 일이다.
수험 기간 중, 한국사 공부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애국심이 끓어오르는 경우가 있었다. 공부하며 알게 된 유적지는 꼭 가보고 싶었고, 수험 생활이 끝나도 한국사만큼은 잊지 않고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아마 공무원 수험 생활을 해보신 분들이라면 꽤나 많이 공감하실 것 같다ㅎㅎ
난 특히 독립운동에 흠뻑 빠져있었다. 김구 선생님, 홍범도 장군님, 안중근 의사님.. 모든 독립투사 분들을 잊지 않고자, 시험이 끝나면 그분들을 기리는 곳에 꼭 방문하고 싶었다. 물론 그런 곳은 대부분 서울에 있었기에 대구 촌놈 감자에겐 굉장히 멀게만 느껴졌었다.
하지만 포기는 없는 법. 교통비와 물병 하나와 샌드위치 하나 사 먹을 돈만 주머니에 꾸깃 챙겨, 7월! 그 무더위를 지나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하필 날을 골라도 주말을 고른 감자씨. 어딜 가도 북적북적한 서울이었다. 그 넓은 서울 안에서도 가장 먼저 들린 곳은 ‘효창공원’이라는 곳이었는데, 어딜 가도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간 건지 공원 안에는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난 감자이기 때문이다ㅋㅋ 죄송합니다.)
효창공원에는 백범 김구 기념관과 의열단원들의 넋을 기리는 의열사,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삼의사들의 묘와 더불어 아직 봉환받지 못한 안중근 의사님의 가묘가 안치돼 있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가는 곳마다 나름의 기도를 올렸다. 그간 공부하며 느꼈던 존경, 감사, 위안들을 감자만의 진심을 담아 고이 전해드렸다. 마음이 촉촉해진 탓인지 묘소 주변으로 피어있던 무궁화가 어찌나 예뻐 보였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잘한 일이었다. 소방서 근무복마다 붙어있는 태극기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어렵사리 지켜낸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대한민국의 어엿한 소방관이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그리는 일도 다 나라가 있어야 가능한 일, 효창공원에 잠들어 계신 분들이 없었다면 생각조차 못할 일이지 않았을까. 누구나 오기 좋으라고 조성된 공원인데 이제야 홀로 인사드리러 온 것이 죄송스럽기만 했다.
광화문 거리만 걸어도 인문학적 감성이 샘솟았다. 나의 구미를 자극하는 여러 박물관들이 줄지어 있어 안 들어가 볼 수 없었는데, 그렇게 즉흥적으로 들어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는 우리 할머니가 살았을 법한 이야기들이 전시돼 있었다.
건강과 문화생활, 여가와 해외여행을 이야기하는 지금의 시대와는 달리, 개발하고 성장하고 성실해야만 했던 대한민국의 과거를 마주할 수 있었다. 광복부터 6•25를 지나 IMF를 이기고 지금까지, 100년 치 노력을 한곳에서 보게 되니 이 대한민국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펄럭.
유럽인들의 뿌리, 바티칸
이탈리아 로마 속,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 교황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바티칸 시국은 여타 나라들 못지않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유럽인의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 바티칸이 가진 위엄은 실로 가늠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지난 10월, 콩자씨와 함께 떠난 이탈리아 여행 중 바티칸에서는 베드로 성인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한창이었다. 베드로 성당을 스크린 삼아 베드로 성인의 생애 영상을 송출해 주었는데, 그저 가만히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결해지는 듯했다.
바티칸은 말 그대로 문전성시였다. 입구에서부터 엄청난 인파가 몰려있었는데, 전 세계의 모든 언어가 광장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가이드를 따라다니면서 카메라 셔터를 터트리고 설명을 경청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내겐 상당히 인상적인 모습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티칸 밖에서 본 유럽인들은 온 세상 자유를 모두 거머쥔 이들 같았기에, 바티칸 안에서의 정갈한 옷차림과 차분하고 정제된 행동들은 꽤나 생소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이런 상반된 모습들은 유럽이 바티칸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을 위한 바티칸 투어는 크게 오전 오후 타임으로 나뉘었다. 워낙 볼 것이 많은 곳이었기에 주요 작품들 위주로 가이드님의 설명을 듣는 투어 일정이었다. 이에 반해 그들의 투어는, 하루종일 그곳에 머무르며 작품들 하나하나 곱씹어보는 투어라고 가이드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그 말씀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니 많은 이들이 깨달음과 감동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사실 바티칸의 작품들은 가톨릭 문화를 모르는 나마저도 엄청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긴 했었지만 말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은 내 생애 가장 충격적인 압도됨을 경험하게 해 주었고, 하늘 아래 나의 부족함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또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는 신의 실존을 확신하게 할 만큼, 특유의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잔-뜩 느끼도록 해주었다.
한국산 감자씨도 이런데 유럽분들은 오죽했을까.
가이드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우리나라는 유교 문화권을 바탕으로 배우고 자라기에 예의와 격식이 중요한 생활관이 형성된 반면, 가톨릭 문화권인 유럽의 경우엔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말씀 같은 성서적 내용이 생활상에 녹아있다고 말이다.
어릴 때부터 존댓말과 배꼽인사를 배우며 자란 우리와 가톨릭의 문화를 정규 교육으로 배우며 자라온 유럽권 국민들이 바라보는 바티칸은, 아무래도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지나가며 마주친 베드로 성당에서 조각만 한 손을 부여잡고 열렬히 기도드리던 꼬마 아이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러 온 유럽인들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진정성 있는 걸음걸음들이었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뮐쌔
아무렴 뿌리가 깊이 박힌 나무라면 당연히 강풍에도 버텨내야 하지 않을까. 훈민정음으로 쓰인 최초의 노래 용비어천가, 이 작품에 쓰인 가사 한 구절의 내용이다.
지난 백 년만 돌아보더라도 우리들의 뿌리는 충분히 깊고 단단히 자릴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린 그래도 어떻게 만들어진 뿌리인지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않을까. 그렇게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시선이 생길 테니 말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감자 심은 데 감자 나고.
뿌린 대로 거두는 이 역사 속,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심어야 잘 심었다고 소문이 날까. 언젠간 누군가의 뿌리가 돼주어야 할 우리들이지 않나!
서울도 바티칸도 자연히 이끌리게 될 지난 이야기들을 애써 서두르며 조급해지기엔, 곱씹어볼 멋진 뿌리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밥 뭇나!”
지난 세월을 알고 나서 이 말씀을 마주했다면 짜증은커녕 밥솥 앞으로 허겁지겁 달려갔을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밥 먹었냐는 말이 그저 인사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할머니들께서 지탱해 나오신 고난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든든한 뿌리 믿고 단단한 가지 하나 뻗쳐 봐야겠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뮐쌔! 얼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