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사과 Jul 18. 2024

무너진 최후의 보루

13

 어둠이 한번 내리깔리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모든 세상을 잠식해 버리듯, 꽤 괜찮아진 줄 알았던 나의 마음에 또다시 '우울'이란 그림자가 캄캄하게 드리워졌다. 마음 놓고 잘 수 있는 시간이 겨우 한 시간 남짓 되는 엄마의 삶을 다시 살다니. 심지어 그걸 내가 다시 선택했다니, 난 정녕 제정신이 아닌 건가. 둘째 아이 출산 후 백일까지 잘 수 있는 잠이라곤 그야말로 쪽잠이 전부였다. 본래 잠이 많은 편인지, 아니면 청소년기 시절부터 오래 쌓인 수면빚 때문인지 나는 언제나 쉽게 피곤해지곤 했다. (학창 시절에 새벽 2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곤 했으니, 수면이 제일 필요하고 중요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작 평균 3-4시간 잠을 자고 살았다. 또 그땐 자는 시간이 마냥 아까워서 최대한 잠을 줄이려고 애쓰며 살았다.) 최소 7시간은 충분히 짜줘야 하루 생활이 좀처럼 순탄하게 이루어진다는 걸 늦게서야 깨달았는데, 출산 후에는 기껏 많이 자야 두세 시간이었다. 



 첫째 때는 아기가 잠도 잘 자는 편이었고, 출산이 처음이라고 엄마가 육지에서 제주로 내려와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다. 무려 백일까지 밤에 아이를 봐주고 도와줬다. 밤에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는 신체적 피로와 엄마와 함께 붙어 있는 시간에서 생기는 정신적 피로 둘 중에 과감히 후자를 선택했다. 우선 수면 부족이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친정 엄마나 시어머니 도움을 받아 아이를 키우는 게 출산 이후의 완연한 육아 문화였으니, 나도 그 대열에 그저 합류할 뿐이었다. 보통의 엄마라고 정의할 수 없는 우리 엄마도 이 대열에선 주류처럼 큰 거부감이 없었다. 마침 일도 안 하고 쉬시던 중이라 나의 다급한 SOS 호출에 응하는 것이 가능했다. 

"엄마, 내가 웬만해선 엄마 안 부르려고 했는데. 나 이러다 진짜 굶어 죽을 것 같아서. 잠깐만 엄마밥 좀 얻어먹게, 괜찮으면 내려와서 나 좀 도와줘요."


 

 그저 시간 때우려고 여기 왔다는 뻔한 태도와 기운을 가졌던 첫 번째 산후도우미는 예민한 나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난 그저 모유수유가 너무 고되고 힘들어서 식사만 제대로 잘 챙겨주길 원했다. 그러나 언제부터 냉장고에 처박혀 있었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오래된 장아찌를 반찬으로 겨우 꺼내놓고, 맹물에 미역을 넣고 대충 한번 끓인 미역물국과 먹다 남은 것 마냥 대강 떠 놓은 찬밥을 갓 출산한 나에게 먹으라고 내밀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없이 자랐어도 평생 그런 밥상은 받아본 적이 없었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먹어본 적이 없었다. 처음 본 충격적인 밥상은 돌아서면 금세 허기지는 모유수유부인 나를 엄청난 생존의 위협으로 밀어 넣었다. 적어도 20년은 넘게 주부로 사셨고 10대 아이를 키우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미역국을 저렇게 끓일 수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안 됐다. 들기름에 불린 미역을 달달 볶고, 소고기든 새우든 뭔가 있으면 넣고, 없더라도 거기에 쌀뜨물이나 물을 넣고 오랫동안 팔팔 끓여서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하면 어지간해서 맛이 없을 수 없는 쉬운 요리가 미역국이었다. 요리를 알지 못하는(일명 요알못) 남편도 썩 잘 끓이는 게 미역국인데, 그 산후도우미의 독특한 조리법은 냄비에 찬물을 가득 담고 미역을 넣은 후에 불을 켰다. 맛이 날 수가 없었다. 

"어머니 부르는 거 진짜 괜찮겠어?"

"응, 여보 나 그 밥상에 너무 충격받아서.. 차라리 엄마랑 같이 지내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먹고는 살아야지. 당장은 먹는 게 우선이니까 그냥 엄마 부를래. 그래도 엄마 밥은 맛있으니까."



 스물한 살, 나는 아르바이트로 겨우 모은 20만 원을 들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핑계 삼아 부모에게서 탈출했다. 그렇게 독립해서 살아온 지 십여 년도 훌쩍 넘었다. 엄마와 다시 같이 산다는 건 나에겐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듣고 싶지 않은 오랜 세월 들어온 이야기를 또다시 들어야 한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휴대폰 컬러링 음악소리가 다 되고도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 '삐- 소리가 나면'이란 멘트가 나올 때까지. 오랫동안 진동이 울리는 전화야 한 번 뒤집고 나중에 '바빠서 전화 못 받았어, 미안해요'란 문자 몇 글자면 그만이지만, 얼굴을 직접 마주한다는 건. 몹시 불안하고 언제나 화로 가득 찬 상태인 엄마의 마음을 괜찮은 척 묵묵히 받아줄 만큼의 여력이 나에겐 없었다. 


 산후도우미는 이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고, 엄마는 두 번째 산후도우미와 친구처럼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 도우미에게 소개받은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을 왕창 태우고 돌아오기도 했고, 어디 김치가 맛있다는 둥 김치까지 서로 주문해 주고 돈을 주고받고 했다. 둘이 무슨 수다를 떨던 나와는 상관이 없었고, 나는 그저 아이를 살피는데 온 신경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산후도우미가 갑자기 나를 붙잡고 얘기 좀 하자고 하더니 눈물을 펑펑 쏟았다. 

"어머니 때문에 제가 너무 힘들어요. 설거지하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잔소리하시고, 청소하면 이건 이렇게 해야지 저건 저렇게 해야지 쫓아다니면서 잔소리를 해서요. 미안한데, 어머니 때문에 저 더는 일 못하겠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몹시 짜증 나는 유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