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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사과 Jul 20. 2024

왜 이렇게 우는거야 왜

15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며 기진맥진한 몸을 겨우 의자에 기대앉아있는 내 모습. 두툼한 수유쿠션이 배를 감싸고, 그 위에선 땀을 뻘뻘 흘려가며 젖을 먹는 둘째 아이. 엄마가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졸거나 말거나, 그저 안아달라고 악쓰며 바닥에 드러누워 우는 첫째 아이. 둘째를 출산하고 조리원에서 12박 13일간 유방과의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나였다. 동네 특성상 산후도우미 업체가 달랑 하나뿐이라 언제나 대기가 많았다. 산후도우미가 오실 수 있는 날까지 무려 6일을 혼자 버텨야 하다니. 수시로 야간 근무에 들어가고, 당직 근무에 들어가는 남편의 근무 덕분에 나는 혼자서 아이 둘을 봐야 했다. 무엇보다 밤에 잠을 제대로 푹 못 자는 게 정말 힘들었다. 



 어린이집을 보내지 않고 가정보육 하던 첫째 아이가 틈만 나면 울었다. 그렇게 순하기만 하고, 딱히 키우기 힘들지 않았던 아이였는데. 내가 둘째를 낳고 조리원에 들어가느라 처음으로 아이와 떨어져 있었던 긴 시간에도 아빠와 몹시 잘 지내고, 밝게 웃기만 하던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동생이 집에 돌아온 뒤로 시도 때도 없이 악을 쓰며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먹먹했다. 둘째 아이를 수유할 때도, 밤에 잘 때도, 언제나 동생이 아닌 자기를 봐달라고 안아달라며 울었다. 아이는 관심을 받기 위해 옷장에 있는 옷을 전부 다 꺼내 늘어놓았다. 장난감을 다 쏟아서 어질러도 놓았다. 둘째 아이 기저귀를 전부 다 꺼내놓고 그 위에서 헤엄을 쳤다. 아기 물건을 가져다 수시로 자기 입에 넣었다. 집안 곳곳 온갖 서랍을 뒤져 물건을 꺼내 헤집어 놨다. 집은 아무리 치워놔도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쑥대밭이 되었다. 밤에 그렇게 잠도 잘 자던 첫째 아이였는데 새벽에 여러 번씩 깨며 잠을 잘 못 잤다. 자다 깬 아이는 짜증이 한껏 나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둘째 아이 수유라도 하던 중이면 당장 먹이던 젖을 떼고 아이를 달래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첫째 아이는 둘째 아이를 트림까지 시키고 눕힐 때까지 꺼이꺼이 숨이 넘어가듯 혼자 울어야 했다. 첫째 아이는 그렇게 울다 잠드는 밤과 불안에 울면서 깨는 아침을 반복했다. 



 둘째 아이도 여간 보통이 아니었다. 누나에 질세라 내 손이 본인 몸에서 떠나기만 울었다. 유일했던 나와 아이 둘만의 시간. 그나마 평화로웠던 조리원에선 갓 태어난 아이가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이제 태어난 지 겨우 갓 3일밖에 안된 아기가 수유하느라 지친 나를 보고 방긋 눈웃음을 지어줬었다. 단순히 신생아 때 나오는 신경반사적 근육수축인 배냇짓이 아니었다. 웃는 소리를 내지 못할 뿐이었지, 하하하라고 웃는 것처럼 정말이지 깔깔 웃던 아기였다. 한두 번이 아니라 매일같이 나를 위해 웃어주며 위로해 주는 사랑스러운 아기였는데. 집에 데리고 온 이후부터 둘째 아이가 누려왔던, 그리고 누리고자 했던 평화의 시간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첫째 아이가 우는 소리에 둘째 아이가 자다 깼고 자지러지게 울었다. 동생이 생기고 나면 무조건 첫째 아이를 우선적으로 살피고 달래줘야 한다는 육아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나는 수유가 아니고서는 언제나 첫째 아이를 안고 달래줬다. 둘째 아이는 땀이 뻘뻘 나고 지칠 때까지 혼자 울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의 울음소리도 커졌고, 강도도 세졌다. 두 아이가 서로 자기를 봐달라며 누가 더 큰 소리로 우는지 경쟁하는 것처럼. 겨우 달랜 첫째 아이를 떼어놓고 달려가 둘째 아이를 안으면 언제나 심장 한 구석이 쓰렸다. 아이들에게 미안함과 나의 지침이 서로 상충했고, 서러움이 북받쳐올라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두 아이와 같이 우는 날이 많았다. 어떤 날은 가까스로 참고 아이를 내려놓고 아이들에게 드러나지 않게 뒤 돌아 서서 혼자 숨죽여 울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아이들보다 내가 더 크게 오열하며 울기도 했다.

  


 내 눈은 계속 감겼고, 양쪽 귀에 아주 세게 때려 박는 울음소리는 머리를 지끈지끈 아프게 했다. 평소엔 두통이 거의 없는 편이었는데 출산 후엔 이상하게 항상 오른쪽 관자놀이 쪽, 측두동맥이 콕콕 쑤셔왔다. 둘째 아이 수유하랴, 첫째 아이 달래 가며 재우랴, 집안일도 해야 하지. 내 몸뚱이는 하나인데 둘이 동시에 나를 원해하니 전쟁통이 따로 없었다. 이미 둘째를 낳기 전 수없이 상상하고 예상하던 시나리오였지만 막상 접하고 보니 보통이 아니었다. 마법을 부려주시던 새로 오신 산후도우미 선생님 덕분에 평일만큼은 숨통이 겨우 틔여졌다. 드디어 나에게도 좌욕을 할 시간과 샤워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된 거다. 그러나 둘째 아이의 울음은 도통 해결되지 않았다.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터진 어느 날, 사정없이 울어재끼는 둘째 아이를 거친 손으로 냅다 침대에 던져 눕혔다. 순간 더 이상 사랑스럽고 예쁜 아이가 아니었다. '첫째 아이는 이러질 않았는데.. 얘는 악마라도 되는 건가, 도대체 왜 이렇게 울지. 왜 이렇게 우는 거야, 왜.'. "그만 좀 울어! 그만!!! 뚝!!!!

 

 자신이 낳은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를 보고 들으면, 이를 바득바득 갈아가며 혐오라는 감정이 치솟던 나였다. 그런 내가 아동학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관련된 사건만 접하면 그렇게 분개하던 나였다. 정인이 사건 때도 그렇게 몇 달간 잠을 설치며 여기저기 탄원서 같이 쓰자고 SNS에서 운동까지 하며 법원에 몇 건의 탄원서가 모아졌나 확인하며 카운트하던 나였는데. 그랬던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이런 끔찍한 마음을 갖다니. 나 스스로에게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랑이 넘쳐야 할 모성애를 찾아보긴커녕, 아이가 더 이상 예쁘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신경쇠약이 온 것 같았다. 



 나는 50 일채 되지도 않은 아기를 바구니 카시트에 눕혀 촬영을 핑계로 여기저길 쏘아 다녔다. (당시 영상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낯선 사람에게 내 아이를 온전히 맡긴다는 것은 예전 같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다. 첫째 아이도 꼬박 6개월을 집에서 데리고 있었고, 한 번씩 산책 정도나 했지 사람들이 많은 곳은 가지도 않았다. 그랬던 내가 산후도우미 선생님이 계실 때면 아예 둘째 아이를 던져놓고, 첫째 아이만 데리고 나가버렸다. 쌀쌀해진 바람이 불어오며 겨울을 준비하던 11월이었다. 산후풍이니 뭐니 걱정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어딘가라도 가서 바람을 쐬어야 내가 숨을 쉬고 살 것 같았다. 그래도 발목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은 항상 챙겨 신었고, 모자와 스카프는 빠트리지 않았다. 엄마는 절대 아프면 안 된다는 무의식의 작용이었을까, 아님 어차피 아프면 결국 내 손해란 걸 알아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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