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사과 Aug 23. 2024

큰 아들 vs 큰 딸

27

그는 오랜만에 누군가와 만났을 때, 살이 빠졌다는 인사를 받으면 언제나 당당하게 대답한다. 항상 입버릇처럼 "큰 딸 키우느라 힘들어요. 쟤 때문에 살 빠져요."라고 하소연을 한다. 애나 어른이나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가리지 않는다. 눈치가 없는 양반이다. 살이 찌지 않고 빠지는 이유를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면, 집에서 먹는 양 자체가 적다.  특히 탄수화물은 살이 찌고 건강에 안 좋다며 아이들보다 적게 먹는다. 위장 기능이 약해 체내 영양 흡수량이 적고, 불규칙적인 근무 환경으로 인한 수면 부족에 취침 시간도 늦다. 흔히들 말하는 초등학생 입맛이라 고기, 라면, 맥주, 유탕 처리된 봉지 과자 외에는 딱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다. 먹는 것에 큰 흥미가 없는 부류의 사람이다. 반면, 활동량이 많으니 기초대사량 대비 섭취 열량을 따져보면 살이 찔 수가 없다. 그런데 왜 그 탓을 나에게 돌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유기농 재료로 정성껏 집밥을 해줘도, 그 정성과 사랑을 음미할 줄 모른다. 맛이 없어도 고생하고 애쓴 노력을 고마워하며 살갑게 먹어주는 형식적인 겉치레조차 없다. 입맛에 안 맞으면 몇 시간을 요리해도 먹지 않는다. 나는 그런 것을 일명 부르주아 입맛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입맛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음식을 두 끼니 연속으로 먹지 않는다. 냉장고에 반찬과 밥이 있어도 스스로 꺼내 먹지 않고 라면과 냉동 만두를 데워 먹는다. 온갖 식재료가 가득해도 먹을 게 없다며, 밥상을 차려 바치치 않으면 그냥 굶고 있는 사람이다. 어쩌다 아이들 끼니를 맡기면, 영양가 있는 조화로운 밥은 기대할 수가 없다. 최소 두세 가지 반찬이나 국을 챙기는 건 기대하기 어렵고, 고기 하나 달랑 구워서 맨밥에 먹이고는 그것도 아주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양념이 많이 들어가거나 자극적인 소스는 싫다면서, 밖에서 먹는 조미료 가득한 음식은 아주 잘 먹고 또 선호한다. 그러니 집에서 해주는 음식이 맛이 없는 게 아니냐는 핀잔이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그에 비해 나는 매 끼니가 소중하고 귀하다. 이왕이면 한 끼니를 먹더라도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먹고자 한다. 특히 식재료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라 내 손에 왔는지,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과 정성이 어떠한지 느낀다. 수련을 통해 곡기가 곧 지기라고 배웠고, 삼시 세 끼를 통해 땅의 기운과 우주의 기운을 내 몸 안에 큰 에너지원으로 공급한다고 여긴다. 정성이 담긴 음식을 먹으면 힘이 나고 즐겁고 행복해지는 나와 그는 본질적으로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나는 나의 관점으로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최선을 다한다. 가급적 외식을 하지 않고, 가공된 음식을 집에 들이지 않는다. 힘들어도 곧 죽어도 내 손으로 만들고, 음식 솜씨가 뛰어나지 않더라도 내 마음과 사랑과 정성을 가득 담는다. 그래서 입맛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음식을 남기는 것을 보면 속이 무척 상한다.



남남처럼 지내던 시간에 나름의 변화를 주기로 했다. 그 변화란 일종의 거리 두기였다. 각자의 자유시간을 만들고 그 시간을 온전히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자유부인, 자유남편이라는 명칭 아래 각자 원하는 대로 쉴 틈을 마련해주기로 한 것이다. 자유남편의 시간을 얻은 그는 밤에 3시간짜리 영화를 혼자 보러 갔다. 나는 주말 내내 독박육아를 고스란히 하고, 으스러지는 몸뚱이를 안고도 다음 날 저녁에 친구와 한치 낚시를 하러 가겠다는 그를 순순히 풀어줬다. 초저녁에 나가서 다음 날 새벽까지 한치를 왕창 잡아오겠다며 의기양양했던 그의 수확은 고작 7마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가 살고 있는 이 가정이 감옥이고, 자유남편의 시간이 곧 탈출이었으며, 군대 훈련받다가 휴가 나온 기분이라 너무 행복했다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그가 오히려 안타까웠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낚시하고 돌아온 다음 날도 아침부터 나가 낮술을 퍼마시고, 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자는 그를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배려했다. 아이들 하원 시간까지 자유를 만끽하라며 풀어줬더니, 이제는 밤에 피시방에 가서 게임을 하고 오겠다는 말을 듣고 기가 찼다. 나는 그렇게 한 번 고삐를 풀어주면 적당히를 모른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됐다. 나와는 본질적으로 너무 다른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해 어렵게 살아가야 하는 이 삶이 내 업보인가 싶었다. 큰 딸을 키운다는 둥, 좋은 남편을 둬서 너는 정말 좋겠다는 둥, 너 없이도 아이들을 지금보다 더 잘 키울 수 있다는 둥, 이 세상에 자기 같은 남자는 없다고, 너랑 살 수 있는 남자는 본인뿐이라며 착각하는 그에게 언제나 나는 속으로 말한다.

'큰 아들 키우는 게 제일 힘든데, 너는 도대체 언제 클 겁니까. 착각은 자유니 마음껏 하시죠.'



사실 거리 두기는 일종의 포기였다. 남편과의 관계를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했던 내 강력한 의지를 끝까지 내려놓고 싶지 않았으나, 결국 내려놓기로 한 것이다.

'그래, 이제 될 대로 돼라. 나는 나 살길 찾아 나로 살 테니 너는 너로 살아라. '

내가 이렇게 내려놓으려 하자 신기하게도 스스로 답을 찾을 계기들이 찾아왔다. 세 번의 계기 중 하나는 우연히 들으러 갔던 영성 치유 전문가 어르신의 특강이었고, 또 한 번은 내가 직접 준비한 강연 내용을 정리하면서였고, 마지막은 북토크에서 강연을 하셨던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 작가님이었다.


영성 치유 전문가이신 어르신은 상대방의 밑바닥을 건드리지 말고, 나의 감정과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라고 강조하셨다. 적금 또는 보험 든다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고맙다고 말해주라고 조언하셨다. 내가 다시 사랑하기로 선택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없으니, 시어머니가 주지 못했던 사랑을, 그가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했던 사랑을 내가 엄마가 된다는 마음으로 대신해주라고 하셨다. 우리 여자들은 ‘엄마’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후 더 이상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성으로서 살아간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리고 나는 <엄마의 첫 단추, 잘 채우는 법>이란 주제로 짧은 특강을 진행했는데, 그 강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특히 출산전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준비와 나만을 위한 시간 준비의 중요성을 내 경험을 통해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또 작가님의 북토크에서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가족에게는 기대를 버리는 것이 가장 좋다. 가족에 대한 기대치가 없으면 만족도가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모두 그에 대한 기대가 높아서였음을 깨달았다.



나 스스로 만든 기대는 그를 프레임 안에 가두고 평가했고, 옥죄고, 힘들게 했다. 그 평가가 높아야만 내가 선택한 이 사람이 나에게 가치가 있고 내 결혼생활과 지금의 삶이 틀린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야말로 그를 그 자체로 온전히 바라보지 않았고, 그를 나의 잣대로 수시로 평가하며 그것으로 나의 선택이 맞았음을 증명하려 했다는 사실에 소름 끼치게 놀랐다. 그도 그만의 상처와 결핍이 있는 나와 똑같은 사람일 뿐인데, 나는 너무 많은 세부 항목으로 그를 따지고 들었으며, 나의 평가에서 절하되는 부분들이 생기면 영락없이 나의 선택이 틀렸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나를 불행하게 했고, 나를 우울하게 했다. 결국 모든 것이 나의 마음에서 비롯된 문제였고, 나의 시각과 생각이 초래한 결과였다. 그 깨달음을 얻고 나니 그에게 무척 미안해졌다.

'너도 그저 사람인데, 너도 그냥 너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존재일 뿐인데, 내가 그동안 그렇게 해주지 못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안하다, 남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