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획에 이유가 있듯, 내 선택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
나는 꽤나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대학원까지 졸업하고서 전공과 다른 일을 하고 있고 한 회사에서도 직무를 두 차례 변경하며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편한 길 놔두고 왜 그런 결정을 해? 정말 후회 안 하겠어?” 결정의 순간마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내게 했던 말들. 근심과 두려움을 뒤로하고 내가 걸어온 지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학문과 사고의 ‘융합’을 중요시했던 모교는 복수전공이 필수였다. 전공 선택에 있어서 인원 제한이나 과 폐지 등의 제한 없이 융합형 인재로 주도적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적극 장려했다. 그 덕에 나는 진심으로 내가 원하는 선택과 도전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전부터 꼭 배우고 싶었던 산업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미술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전공으로는 고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공부해오던 생명과학을 택했다. 다만, '생체모방 공학' 분야로 진로를 뻗어나가고 싶었기에, 소재 쪽으로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화학공학으로 전과를 했다. 꽤나 다른 두 전공을 병행하느라 고생도 많았고, 전교생 중에 유일한 케이스였기 때문에 (전공필수 시간이 겹치는 등) 행정적인 불편함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배움이 즐거웠다. 산업디자인이 특히 그랬다. 아이디어를 실제적으로 구현하고 내 손으로 제작하는 기쁨이 있었다. 과 친구들과는 달리 공학 기반의 지식을 보유한 나로서는, 제품의 메커니즘을 빠르게 이해하고 어떤 소재를 사용하면 좋을지 접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적성은 잘 맞았지만 부던한 노력에도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었는데, 바로 시각화 능력이다. 친구들은 대부분 미술학원에서 이름 좀 날리거나 그림 좀 그려봤던 반면, 나는 사람을 그려도 졸라맨을 그렸던 만큼.. 그 격차는 대단했다. 디자인에서 시각화 능력은 이공계에서 미적분과 같다. 우리가 어려움 없이 호흡하듯이 기본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다. 머리에 가득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시각화하여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고심 끝에 경쟁력 측면에서 우위에 있는 화학공학 전공 석박통합 과정생으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특목고에 들어가 고교시절부터 걸어온 과학의 길. 과학을 교육으로 접하는 기간이 길었던 탓일까? 과학에 대한 순수한 흥미와 인류발전에 대한 순수한 열망보다는 저명한 출판지에 다량의 논문을 게재하기에 급급한 연구 환경에 적잖이 실망했다. 실망은 계기가 되어 자아성찰의 기회로 이어졌다. 나는 연구자로서 논문을 읽고 연구하고 논문을 쓰는 것보다, 당장 지금의 사회문제에 공감하고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직접적인 보람을 느끼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내 연구업적을 보고 상업화/상용화하는 것보다 내가 그 주체, 즉 기업가가 되길 바랐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걸어온 길을 벗어나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굉장히 두렵고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내가 걷고 있는 길은 꽤나 높은 확률의 성공을 보장하고 있었다. 흔히들 ‘취업 깡패’라고 말하는 화학공학도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고 이를 대변하듯 선배들도 졸업 후 대기업과 해외로 진출하여 승승장구하였다. 그럼에도 내가 진로 변경을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1. 지금까지의 경험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며 남들 말대로 2. 박사학위를 얻고 연구자로서 대기업을 가는 것이 결코 행복한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고 3. 내가 바라는 최고의 모습으로 세상에 기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심이 선 순간, 학위 수여를 포기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까 고민도 많았다. 시간은 금이니까. 하지만 훗날 인생을 회고할 때, 도피했다는 후회나 미련의 여지 대신 주어진 상황에 책임을 다한 모습을 남기고 싶었다. 석박통합에서 석사로 전환하여 졸업함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이곳에서 끝장을 본 덕에, 이후의 내 선택에 한치의 후회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이 것이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배운 사실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이후에 뒤돌아볼 일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이 된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내 가슴이 뛰는 것. 그 길을 따라 ‘기획자’로서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도전의 기간을 무한정으로 두면 안일해지고, 공백의 기간이 길어져 이도 저도 안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그래서 ‘1년 안에 승부를 보겠다’는 배수의 진을 치고 사회적 기업, 스타트업, 대기업 등 다양한 문을 두드렸다. 감사하게도 도전한 지 8개월 만에 여러 곳에서 합격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나를 잘 알았다. 한껏 뜨거워진 마음을 다 잡고 도전을 시작하지만, 도전의 시간이 무한정 길면 내게 독이 될 것을 알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흘러가는 시간에 익숙해지고, 열정은 점점 식어갈 것이라는 것이다. 열정에 불을 지피기 위해 지속적으로 땔감을 공급해야 할텐데, 그 땔감은 나 자신이 될 터였다. 또한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잦은 실패에 익숙해져 위닝 멘털리티를 잃고 자존감이 낮아질 것도 예상할 수 있었다. 이 도전의 끝을 미리 설정해두지 않았다면, 나 자신을 찾고자 했던 호기로운 여정의 끝에 마주하게 될 것은 나 자신을 잃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도전은 기간을 두고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아래 항목은 다른 글에서 소개했던 내용으로 회사를 선택할 때 고려했던 항목이다.
-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곳인가?
- 무엇을 얻어갈 수 있는가?
- 도메인이 내 관심사와 부합하는가? 그리고 성장 가능한 산업인가?
- 기업의 제품/서비스가 고객의 필요를 잘 채워나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스스로 매출을 내고 지수적 성장을 이루겠는가?
모든 기획에는 이유가 있듯, 내 선택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원칙에 따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고, 질문에 대한 답이 모여 최종 선택의 이유가 되었다. 몇 편에 걸쳐 내가 도출했던 답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