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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Apr 19. 2024

뒤로 걷는 시간 2


 사실, 오랫동안 여자는 어렴풋한 아픔이 오래 심장을 누르고 있다고 여겼을 뿐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게 막연하게 슬펐다고 해야 할까? 무기력한 상태로 이대로 삶이 조용히 끝이 났으면. 별다른 고통 없이 그러할 수 있기만을 바랬다. 오랜 시간 동안 그런 생각이 여자를 지배했다. 대체로 무탈하고 무난하게 살아갔지만 왜인지 기억은 늘 죽음에 관한 것들이었다. 평범한 일상과 달리 어둡고 추운 자리에 대한 기억이 여자를 종종 사로잡았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이 번번이 여자를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했다. 여자를 위로했던 건 달이었다. 달을 볼 때면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달을 볼 때면 이상스레 눈물이 났다. 그리움이었다. 모든 풍성한 나뭇잎들이 화려한 잔치를 끝내고 땅속으로 묻혀가는 시간. 추락의 슬픔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그 시간. 여자는 그 시간을 기다렸다. 그 시간만큼은 어쩐지 세상과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여자는 낙엽 지는 늦가을의 시간을 사랑했다.    

  

여자의 자궁은 오랫동안 말라 있었다. 물기 없는 사막. 그렇게 태어난 것뿐이라고. 여자는 그것이 더는 슬프지도 않았다.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운명이라 받아들였을 뿐. 사막과 같이 메마른 생명 없는 땅. 그래서 여자는 차라리 묻히고 싶었는지 모른다. 땅속 깊이 묻혀 태초의 그곳. 태어나던 그 순간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생명을 잉태하는 바다, 거기 닿고 싶었는지 모른다.     

      

墓 묘. 여자는 이 글자가 좋았다. 순탄하고 평범한 생이었다. 그럭저럭 무리 없이 살아왔고, 딱히 바람도 욕망도 없었다. 다만 종종 더 깊은 휴식을 원한다고 느꼈을 뿐. 여자는 땅속 깊이 항아리를 묻어두고 들어가 앉아 있는 상상을 하곤 했다. 여자에게 그곳은 지상에서 가장 고요한 안식처인 것만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고요하게 마음이 가라앉는 자리. 여자에게 명상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문득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하다 숨어든, 세간살이 하나 없는 이웃집 할머니의 한 칸 방. 작은 탁자와 성경책 한 권이 전부였던 그 정갈한 방이. 잊고 있었으나 늘 그리워했던 아늑하고 포근했던 그 집 부엌 아궁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번잡스러운 여자의 집과 달리 할머니의 단칸방 부엌 아궁이는 여자에겐 엄마의 자궁 같은 장소였다. - 사실 여자는 엄마의 따뜻한 자궁을 떠올리기 어렵다. 그래서 할머니의 부엌 아궁이에 대한 기억으로 대체했을지도 모른다- 몰래 엿본 할머니의 방. 여자가 바래 온 공간은 그런 것이었다. 여자는 할머니의 단칸방에 대한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일에 익숙해져 갔다. 그것이 실제 여자의 오랜 바람이었는지, 아니면 여자가 욕망했던 것들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결과로 불러낸 기억인지 선후는 분명치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여자에게 그 기억이 수면 위로 선명하게 떠오를 무렵부터 마치 오래된 소망을 실현하는 것 같은 기쁨을 여자가 느꼈다는 것이다. 그 무렵 여자는 자신의 운명 앞에 놓인 이 글자를 발견했다.     


 墓 묘. 추수가 끝난 가을 들녘, 떨어지는 낙엽처럼 땅속 깊이 묻히는 시기라고. 여자에게 이 글자는 그동안 바래 온 무의식적 소망을 실현해도 좋다는 신의 허락 같았다. 정작 죽음은 평온했다. 생각처럼 두려운 곳이 아니었다. 그냥 일요일 같은. 영원히 일요일 같은. 월요일이 오지 않는 그런 느낌. 텅 비어 있는 공간.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렇게 지내던 날들을 한참 지나 여자는 그동안 헛소리로 여겨 온 죽은 자들의 노래를 들었다. 그곳은 언어가 사라지고 음률만이 파장으로 어디로든 흘렀고 흐르는 대로 물결을 이루듯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 언어였고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였다. 그곳의 시공간은 정지해 있는 듯하면서도 온 우주의 시공간을 품고 있는 듯 그렇게 흘렀다. 그곳에선 운명이 또렷하게 보였다. 전생과 후생이란 별자리의 이동 같은 것이었다.      

늦가을 산, 그늘진 곳에 외롭게 말라가는 고목. 그것이 지나 온 별에서 위치한 여자의 자리였다. 여자는 자신이 말라버린 고목이었음을 제 눈으로 확인했다. 마음 한편 늘 느껴 온 대로 거기 여자가 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니, 그렇게 서 있는 채로 누워 있었다. 가만히 오래 지켜보았고, 그러자 가슴 저 아래 명치끝이 뜨거워지더니 끓어올랐다. 둑이 터지듯 아래로부터 물이 끓었고 넘쳐흘렀다. 여자가 울기 시작하자 말라버린 고목에도 물이 스며들었다. 고목에 물이 촉촉이 젖어들어갔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노래였다. 여자가 오래전에 들은 노래가 마른 고목에 흘러넘쳤다. 엄마의 자궁 안에서도 여자는 이렇게 울었을까. 태초의 시간. ‘아니’를 지나 ‘그래’로 시작하는 태초의 이야기. 비로소 여자는 씨앗을 하나 품었다. 겨자씨만 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 전해 내려왔으나 믿지 않았던, 믿을 수 없었던 이야기. 그랬다. 믿음은 믿으려는 마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믿음은 그저 체험의 결과일 뿐이었다.


 죽음과 부활. 그것은 그저 낮과 밤이 교차하듯 겨울 지나 봄을 맞는 순환에 불과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자에게 순환은 적어도 진화를 품은 변화여야 했다. 오랫동안 길들여진 방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봄. 헛바퀴를 돌리는 봄이 아닌 우주적 차원의 내핵의 폭발. 여자는 그런 진화를 상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에겐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주를 품기엔 여자의 가슴은 너무 빈약했고, 여자의 뇌는 너무 옹졸하다고 여겨졌으므로. 그래도 다행인 건 여자가 제 그릇됨을 충분히 마주하고 있다는 것. 거기 오래 머물렀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거기서 무수히 많은, 자기 꼬리를 감고 뱅뱅 돌아가는 재빠른 헛바퀴들을 목격했으므로. (그러나 이 또한 여자의 착각이기도 했다. 헛바퀴를 돌리는 건 오히려 여자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여자는 자기 내부의 궁전 속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고, 그것은 여자의 별자리를 이동시킨 사건이었다. 그녀의 한 칸 방. 오래된 탁자와 성경책 한 권이 전부였던 그 방, 그녀의 부엌 아궁이. 오래전부터 품어 왔으나 여자가 의식하지 못했던 여자의 씨앗 하나가 거기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랬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직선이 아니었다. 현재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열고 있을 뿐. 여자는 그녀와 자기만의 방에서 묵은 책을 읽기 시작했고, 오래전에 죽은, 아니 여전히 함께 살고 있는, 미래와 이야기를 나눴다. 여자의 영혼을 먼저 체험한 그들과 함께 하는 동안 여자는 외롭지 않았다. 여자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동시에 여자의 미래이기도 할 그들의 이야기만 듣는 것만으로 여자의 현재는 충분했으므로. 달리 더 무엇을 바랄까. 그렇게 여자는 다른 별의 시간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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