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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Apr 28. 2024

어떤 잡담.

파이 이야기

 어떤 잡담.     


 오래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본 후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A는 파이가 조사원에게 들려준 두 번째 이야기를 통해 파이와 리처드 파커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는 거짓임이 입증된 것이니 신화의 허구(신의 존재)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B는 바나나가 실제 물 위에 떴다는 사실을 근거로 과학의 오류를 지적하며 신화적 사실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둘의 싸움은 기이하게도 격렬했다. 파이가 들려준 이야기의 전면에 신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이들의 대화는 도킨스적 무신론자와 신화를 문자적 사실로 믿는 근본주의 신앙 간의 격렬한 논쟁이 되어갔다. 그러자 이어 C가 말했다. 진실은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이거나, 두 이야기 모두 온전한 답은 아닐 수도 있지 않느냐고. 나름 신중한 고민 끝에 결론 내린 C. 이어 자못 비장하게 자신이 생각한 근거를 제시해 보려는 찰나, 아니 이건 뭔 하나마나 한 개풀 뜯어먹는 소리? A와 B가 동시에 코웃음을 쳤다. 둘은 어느새 의좋은 형제로 돌변했고, C는 그날, 둘 모두로부터 소신 없는 불가지론자 취급을 받았다. 대화가 끝나고 셋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영화는 그렇게 각자 평소 자신이 믿는 대로 해석되었다. 이후 그들은 자기 확신의 근거가 될 단서를 더 모았을지도 모르고 혹은 자신의 믿음 때문에 놓친 파이 이야기의 이면들을 곱씹었을지도 모른다. (그중 내가 아는 건 c의 마음뿐이니 c의 입장을 좀 더 차분히 들어보자.)   

   

C는 억울했다. 생각하면 참 황당한 일 아닌가. 판타지 동화 같은 첫 번째 이야기를 사실이냐 아니냐로 검증하려 든다는 점이. 우리는 신화를 참과 거짓으로 따지지 않는다. 쑥과 마늘을 먹고 곰이 사람이 되었다거나 주몽이 강을 건널 때 하늘이 도와 자라가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해서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가 되어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는 천우신조에 대한 문학적 비유로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그런데 왜 모세가 신께 빌었더니 바닷물이 쩍 갈라져 홍해를 건넜다는 이야기나 마리아의 처녀 수태 등은 여전히 논쟁거리가 되는 것일까. 사실 C는 그 점이 늘 의아했다.      


바나나가 물에 뜰 수 없다고 여긴 조사원에게 바나나가 물에 뜰 수 있음을 보여 준 파이, 조사원들이 믿는 과학적 사실의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첫 번째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조사원들의 맹점을 찔렀다. 그러나 그것이 첫 번째 이야기의 사실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B는 이를 덥석 물었다. 이를 근거로 신화의 사실성도 머지않아 과학적으로도 입증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관심의 초점이 첫 번째 이야기가 주는 내적 진실성이 아니라 사실성만을 따지고 있다면 이는 눈에 보이는 사실이 아니면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조사원과도 다를 바 없는 태도 아닌가. C의 눈엔 둘 모두가 외적 사실과 객관에 치우친 편향적 확신범들로 보였다.( c의 주장에 A와 B는 모두 분명히 억울해할 것이다. 이 도식적 규정에 항의하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오해를 풀 날도 곧 올 테니까.)  

   

신화학자 카렌은 우리 의식이 지나치게 외부와 객관, 이성과 합리에 치우쳐 내면의 신화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신화마저도 사실의 언어로 인식하고 참, 거짓으로 판별하려 한다는 것이다. 양극단의 ’ 무신론‘과 ‘문자 근본주의 신앙‘은 종교사에 유례없는 근대 의식의 편향된 결과물이라고 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과학적 근거를 찾아내려 했던 근대신학은 신화의 실재를 증명하려다 이야기가 전하는 내적 진실로부터 멀어져 버렸다는 점에서 조사원들의 입장과 그리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신화를 부정하는 과학을 비판하며 과학의 노예가 되어버린 아이러니. 그것이 카렌이 지적한 근대인의 자화상이었다.

     

C는 그동안 자신이 내적 체험으로 느껴온 것들에 대한 답을 카렌으로부터 얻었고, 신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분명히 정리해 갈 수 있었다. 파이이야기는 카렌이 들려준 신, 신화와 종교, 종교와 과학의 문제에 관한 놀라운 문학적 결과물로 여겨졌다. c는 파이 이야기를 오래 곱씹기로 했다. 내심 양극단의 확신범들에게 소신 있는, 믿음의 불가지의 자리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과연 C는 자신이 옳음을 증명할 수 있었을까. ( 빨리 네 결론을 말하라고 채근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이 글은 좀 길고 지루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답안지가 아니라 나와 파이 사이의 맥락을 더듬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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