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문장
열음은 입이 바짝 말랐다. 얼마 전 독감 때 쉰 것 때문에 반차를 쓸 상황도 아니었다. 백번 양보해서 상황이 된다 쳐도 동료들의 눈치가 보였다. "이러니까 애 엄마랑 같은 조 되면 조원들만 독박 쓴다니까" 같은 뒷말을 듣지 않으려면,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 했다. 결국 훈이 열음 대신 반차를 쓰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 지온은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열음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낄낄대는 훈을 돌려앉혀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훈의 대답은 간단했다. '친구랑 싸웠고, 지온이 시아를 물었다더라. 큰 일 아닌 것 같던데 사과는 하는 게 좋겠다더라. 시아 엄마에게는 네가 연락해 봐라.' 대답을 마친 훈은 이내 tv를 끄고 안방으로 가 곧바로 요란스레 코를 골기 시작했지만, 열음은 새벽 늦도록 뒤척이다 겨우 선잠을 잤다. 그리고 마주하기 싫은 아침이 밝았다.
퉁퉁 불은 눈으로 지온을 맞이한 원장 선생님이 전달한 어제의 상황은 훈이 전달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지온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시아가 갑자기 뺏어가면서 싸움은 시작되었고, 지온이 "돌려 달라"라고 여러 차례 말했음에도 시아가 듣지 않았다. 오히려 또래보다 말이 빠른 시아가 지온에게 말로 쏘아대자, 화가 난 지온이 답답한 마음에 시아를 물어버린 것이었다. 깊게 물린 상처가 아니어서 하원할 때 시아 엄마에게 말했고, 시아 엄마는 그 자리에서 언성을 높이며 cctv까지 확인하고 갔다. 게다가 뒤이어 시아 아빠까지 와서 cctv를 확인했고 연달아 드잡이를 당하며 원장 선생님도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모양이었다.
"경찰이 와야지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cctv 아니었나요? 이게 cctv를 열람할 만큼 큰 일이었나요?"라는 질문이 열음의 목 안에서 나올락 말락 했다. 열음은 가까스로 그 질문을 삼키고 마음 쓰시게 해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다 돌아 나왔다.
열음은 몇 번이나 목소리를 가다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3번도 채 가지 않아 전화받기가 어렵다는 문자와 함께 전화는 끊겼다.
[제가 어제 일하느라 애기아빠한테 늦게 상황을 전달받았어요. 시아는 괜찮나요? 죄송합니다.]
열음이 보낸 메시지 옆의 1은 전송과 동시에 사라졌지만, 왜인지 하루 종일 답장은 받을 수 없었다. 열음은 종일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집안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멍하니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하원할 시간이 돼서야 받은 답장은..
[아이 아빠가 화가 많이 났어요]였다.
이건 무슨 말일까? 대답을 요구하는 말인가? 그런데 뭐라고 대답하지? 아, 그러시군요. 그럼 제가 어떻게 화를 풀어드릴까요? 아니지. 화가 나실 만하죠.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데 아이 아빠는 화가 많이 났고 본인은 화가 안 났어? 이런 말은 대체 왜 보내는 거야? 아이 아빠가 화가 많이 났다고 하면 내가 더 미안해야 하는 건가? 대체 무슨 뜻이지?
답장을 여러 차례 고쳐 쓰던 열음이 마지막에 보낸 메시지는 [죄송합니다]였다. 그 메시지를 끝으로 시아 엄마도, 열음도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열음은 이렇게 어설프고 불안한 마무리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이 아빠가 화가 많이 났어요"라는 말은, 자신은 유난맘이 되지 않으면서 이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이란 걸. 하지만 열음은 그 뒤로도 그 문장을 절대로 자기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는 살고 싶지 않았다.
어린이집 원아들과 학부모까지 참여하는 봄맞이 소풍날. 지온은 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김밥을 쌌다. 어설픈 김밥이지만 나란히 통에 담아두니 그럴듯했다. 소풍에 대한 기대감에 신나서 조잘대는 지온을 챙겨 어린이집 앞으로 가자, 노란색 버스가 보였다. 열음은 버스 앞에서 안내중인 선생님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꽤 소란스럽던 버스가 열음과 지온이 버스에 오르자마자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기분 탓일까? 열음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찾아 앉았지만, 찜찜한 기분은 해소되지 않았다. 열음의 등 뒤로 속닥속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나 때문인가? 뭐지?
딸기농장에 도착해서도 열음과 지온은 은근히 열외 당하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벽이 느껴지지 않았고, 지온도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붙임성 없는 내 성격 때문이려니, 열음은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려 노력했다.
"시아 그때 이후로... 이랑 안 어울리잖아요. 동물 같았대."
"그럴 만 하지. 개도 아니고. 아니 차라리 때리는 게 낫죠. 애를 어떻게 키우는 거야 진짜..."
"치료비는 받았어요?"
"아이. 됐어요."
"뭐야, 치료비도 안 줬단 말이에요? 진짜 무개념이네."
"죄송합니다 딱 하나 왔더라구. 하다 못해 밴드라도 보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에효, 말해 뭐해요. 그날 우리 시아 아빠 엄청 화났었거든~"
소리 나는 곳으로 열음이 고개를 홱, 하고 돌리자 모여있던 엄마들이 제각기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는 열음이 다시 지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빵, 터지며 깔깔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해졌다. 시아와 지온의 일로 우리 모녀는 왕따가 돼버린 거다. 훈은 영원히 알 수 없겠지. 알려고 하지도 않겠지만. 그러니 우리 둘만 왕따인 거다.
그 일이 개념 없는 아줌마 몇몇의 촌스러운 여왕벌 놀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온은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친구를 물었고, 그때마다 열음은 퉁퉁 부은 눈의 원장님을 마주해야 했다. 상대 아이의 엄마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밴드도 보내고, 연고도 보내고, 치료비도 드리겠다고 해보았지만 받겠다고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더 철저히 고립될 뿐이었다.
억울했다. 지온이 당했을 때 열음도 누군지 궁금했고 "내 새끼한테 누가 손댔어!"라며 소리도 꽥 질러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부모란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지온이 지향하는 부모였기 때문이었다. 내 자식 귀한 만큼 남의 자식도 귀하니까. 사정이 있겠지.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참았는데. 나는 다 참고 이해하려고 했는데. 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왜 우리를 참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걸까?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그리고 자신이 억울함을 느낀다는 사실이 스스로 역했다. 나는 부모인데. 부모는 원래 자식의 일을 책임지는 사람인데. 나는 왜 이것이 당연하지 않고 억울한 걸까. 나는 좋은 부모 되기는 틀린 걸까? 역시 보고 배운 건 무시할 수 없나?
하지만 당장 열음이 느끼는 억울함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지온의 '무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고쳐놔야만 했다. 열음은 지온을 타일러도 보고, 혼내도 보고, 급기야 때리기도 해 보았다. 하지만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개새끼도 아니고 대체 왜 친구를, 사람을 무느냐는 악에 받친 막말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 결과, 말은 또래보다 느린 지온이가 '개새끼'라는 말만 배우는 결과를 낳았다. 열음은 이 일로 자신을 더 자책하게 되었다.
열음은 이제 하원할 때마다 지온을 안고 집까지 뛰었다. 놀이터를 보면 자신도 놀고 싶다고 떼를 쓰고 드러눕는 지온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대놓고 지온 모녀를 무시하는 엄마들과 한 공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자신도 없었다. 열음은 뻔뻔해지기보다 나쁜 엄마가 되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서 하원할 때마다 엉엉 우는 아이를 안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반복됐다.
이 모든 것이 해만 바뀌면, 어린이집만 옮기면, 혹은 이사를 가면 해결될 거라 믿었다. 이 어린이집, 하필 같은 반 엄마들이 이상한 거라고. 그러니까 나는 아무 문제없다고. 잠깐만 고생하면 되는 거라고.
*연재 주기가 늘어져서 송구합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고 있다보니 매주 같은 날짜에 발행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많이 서툰 글임에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날씨가 아직 쌀쌀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