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의 충돌


사악- 사악-


뱀니는 정성스레 칼을 갈았다.

이미 섬뜩할 만큼 날카로운데도.


"얘야, 손 다칠라. 그만 갈아..."

"어머니,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들어가 계세요. 제가 누구예요. 배암골 으뜸 송곳니잖아요."


뱀니는 쪼그리고 앉은 채로 고개만 들어 씩 웃어 보였다.

이른 여름의 서늘한 바람도 그의 열띤 이마를 다 식혀주지 못했다. 눈썹에서 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에잇, 땀 들어가면 안 되는데. 어머니, 위험하니까 가까이 오지 마시고 저기 잎사귀나 한줌 뜯어서 던져 주세요. 에헤이, 오지 말고 던지라니깐."


아들의 만류를 못 들은 체하고 다가와 나뭇잎으로 땀을 훔쳐내는 어머니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아들의 목덜미가 새순처럼 여려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그의 목줄기는 배암골에서 가장 굵었다. 잎맥처럼 갈라진 푸른 핏줄이 시냇물같이 펄떡이고 있었다.


아들의 뒤에 서 있던 어머니는 안절부절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나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워서였다.

한참 말을 고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얘... 윗마을 어른들이 구리칼로 하시는 게 낫지..."

"어머니!"


벌떡 일어나는 서슬에, 열심히 갈던 돌칼이 땅에 부딪히며 또각 분질러졌다.

뱀니는 손잡이만 남은 칼을 든 채 눈을 홉떴다. 그리고 어머니를 향해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


"구리칼 들고 설치던 윗마을 할배 아들, 오늘은 어디 있나요? 범이 물어가는데 그깟 구리칼로 뭘 해요? 뱀이어야 해요. 자기보다 큰 짐승을 삼키는 건 뱀만 할 수 있다고요!"


어머니는 아들을 뜯어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입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그저 우두커니 아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구리칼을 든 젊은 털복숭이가 다가오며 비아냥댔다.


"오~ 뱀은 제 어미를 물어 죽인다더니, 배암골 핏줄 어디 안 가는구만. 여차하면 찌르겠는걸?"

"... 어르신 오셨어요."


황급히 눈가를 닦아내며 한참 나이 어린 털보에게 머리를 굽히는 어머니와 달리, 뱀니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짓씹듯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흥, 떼로 몰려가서 짐승 하나 못 잡는 머저리 녀석. 꺼져라."

"네 어미는 바보라서 내게 고개 숙이는 줄 아나? 싸움에서 진 마을이 잘 먹고 잘 사는 게 누구 덕분인지 생각해 봐, 멍청한 뱀의 핏줄아."

"어머니뱀의 이름을 더럽히면 물어 죽이겠다."


뱀니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으나, 털보는 픽 비웃었다.

오히려 손에 든 구리칼로 뱀니의 손에 남은 돌칼 손잡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치만 네 이빨은 부러졌는걸?"

"... 네 장난감은 망가졌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뱀니는 구리칼을 든 상대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어, 하며 놀라는 털보에게 다가가 팔에 매달리듯 무게를 실었다. 칼이 두 사람의 무게를 싣고 지팡이처럼 땅에 박혔다.

뱀니가 잽싸게 발을 들어 칼등에 얹고 힘을 주자, 가운데가 왈캉 휘어버렸다.


"어어, 이거 왜 이래."


망가진 칼을 보며 망연해하는 털보의 손을 털어내고, 뱀니는 땅바닥에 박아 세워둔 흙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릇을 절반쯤 채운 끈적한 액체가 찰랑, 싯누런 물결을 일으켰다.


"방울뱀을 좋아하는 듯하던데, 침이나 한 모금 줄까?"


털보는 이를 보곤 깜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그러다 어머니가 달려와 그릇을 뺏는 걸 보고는, 휘어버린 칼을 붕붕 휘두르며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범은 내가 잡을 거야. 방울이도 곧 내 아내가 될 거다."


이 말을 들은 뱀니는 활을 집어 들었다.

화들짝 놀라 줄행랑치는 털보의 등짝에 화살을 매겨 겨누다가, 갑자기 반대로 홱 돌아서 먼 산을 향해 화살을 날려보냈다.

유달리 뾰족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씩 웃으면서였다.


"범은 이쪽에 있어. 그러니 내가 잡는다."


뱀니는 모진 겨울을 지내면서 응어리진 방울뱀들의 침을 모으려고 온 산을 헤집었다.

달이 두 번 차고 기우는 동안이었다.


'이만하면 울타리를 넘는 반달곰이든, 밭을 헤집는 멧돼지든 다 물리칠 수 있겠다.'


그릇에 잔뜩 담긴 싯누런 뱀침을 보면 마음이 뿌듯했다.

방울이에게 안겨줄 예쁜 꽃도 한 아름 꺾었다.


하지만 배암골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윗마을에서 노랗게 번쩍번쩍 빛나는 칼을 들고 쳐들어왔다고 했다. 구리칼이었다.


배암골을 지키는 송곳니는 모두가 날랜 싸움꾼이었다.

맨주먹으로 승냥이를 때려잡고, 벼린 돌칼을 들면 홀로 곰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즐비했다.

송곳니들이 돌칼을 매섭게 휘두르며 뛰어나갔다.


그러나 구리칼과 부딪힌 돌칼은 맥없이 깨어졌다.

구리칼은 가죽을 겹쳐 만든 두꺼운 옷도 쑥쑥 뚫고 들어왔다.

자리를 비운 뱀니만 빼고, 배암골을 지키는 송곳니가 그날 모두 부러졌다.


그리고 방울이는 윗마을 늙은이의 며느리가 되었다.


'그때 내가 마을 안에 있었다면...'

뱀니가 매일 하는 생각이었다.


윗마을 놈들을 다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일어서자, 배암골의 모두가 그를 도로 주저앉혔다.

윗마을 사람들이 와줘서 더 살기가 좋다나? 옷도 밥도 더 좋아졌다나?

그 대신에, 그들을 웃어른으로 모셔야 한다고 했다.


"뱀은 아무도 모시지 않아요!"

라고 소리쳤으나, 몇몇 배암골 사람들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윗마을에게 밭일하는 법을 배운 아저씨, 새 그릇을 함께 만들어본 아주머니, 튼튼한 구리 낚싯바늘을 선물받은 할아버지...

윗마을이 온 지 겨우 한 달 만에, 배암골은 그들에게 온통 젖어들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물건이 더 좋다면 그걸 쓰는 게 맞다.


다만 뱀니를 열받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윗마을의 수염만 긴 늙은이였다.


"에에잉... 범을... 잡아오는 녀석은... 음냐... 그, 뭐냐... 방울이, 끅, 방울이의 짝이... 될 것이야..."

"예, 하늘님. 꼭 그리해야지요. 하늘님 뜻대로 하셔야지요."

"미친놈들, 또 지랄이네. 어휴."


역겨울 정도로 이상한 믿음이었다.

자기들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저 늙은이에게 술을 잔뜩 먹였다.

늙은이가 심하게 취하면 머리에 빛나는 구리 모자를 씌우고, 손에는 구리 거울과 방울을 쥐여준다.

그리고 아무 말이나 내뱉기를 기다린다. 그게 하늘님의 뜻이란다.


그 잘난 하늘님의 처음 뜻이란, 방울이를 자기 아들에게 주라는 거였다.

하지만 아들이란 놈은 방울이의 손도 못 잡아보고 범에 물려갔다.

이튿날에는 방울이를 윗마을에 고분고분 갖다 바쳤던 그의 못난 아비도 물려갔다.

범이 자꾸만 사람을 잡아가는 요즘, 늙은이는 날마다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그 앞에 엎드려서 꾸벅꾸벅 절하며 예, 예 해댔다. 윗마을 놈들뿐 아니라 배암골 사람들도 그랬다.


뱀니는 이 꼴을 보고 있노라면 어이가 없어서 피식피식 비웃음이 나왔다.

뱀니는 그딴 건 믿지 않았다.

저렇게 먼 하늘에서 배암골이 보이기나 하겠는가.

그래서 늙은이가 거울로 비춘 햇빛은, 결국 범의 위치를 전혀 엉뚱하게 가리키지 않았는가.


뱀굴을 찾아 헤매던 지난 겨울, 뱀니는 범 똥을 몇 번이나 봤다. 햇빛이 가리킨 기슭과는 동떨어진 산골에서다.

그는 마을 사람들 몰래, 범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깊은 구덩이를 팠다.

그 아래에 뾰족한 나무 말뚝을 잔뜩 박았다.

가느다란 나무와 풀을 엮어 구멍 위를 덮고, 멧돼지 가죽을 문질러 냄새를 묻혀 두었다.


그래서 결국 지금, 뱀니가 내려다보는 구덩이에는 상처 입은 범 한 마리가 쌕쌕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다.


빠드드드득-


뱀니의 활이 우는 소리를 냈다.

배암골에서 가장 질긴 나무로 만들어, 뱀니 말고는 당길 사람이 없는 활이다.


피융-

크헝----


시위를 놓자 범의 어깻죽지에 마지막 화살이 퍽, 하고 박혀들었다. 범의 몸뚱이에 꽂힌 화살은 이로서 열 대였다.

송곳니를 닮은 화살 촉에는 하나같이 방울뱀 침이 듬뿍 묻어 있었다. 이대로 반나절이면, 제아무리 범이라도 움직임이 멈추리라.


웅성- 웅성-


이때, 웬 인기척이 들려왔다.

귀가 밝은 뱀니라서 간신히 들리는, 먼 데서 나는 말소리였다.


"털보야, 하늘님이 범은 저쪽 기슭에 있다고 하셨잖아. 여기에 있을 턱이 있냐?"

"아니에요, 방금 범 우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니까요!"

"듣기는 뭘 들어. 범 울음은 온 산골을 쩌르릉 울린다던데."

"아이 참, 소리가 작으니 멀리에 있나 보죠. 어쨌든 이쪽이라고요."


털보 녀석이 용케도 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윗마을 사람들 여럿을 데리고 오는 듯 웅성거렸다. 구리칼끼리 짤랑짤랑 부딪히는 소리도 들렸다.


그들의 말소리에는 은근한 무서움이 어려있었다.

떠들면 범이 떠날 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도 연신 입을 놀리는 까닭은, 차라리 범이 듣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겁쟁이 놈들. 이미 내가 다 잡아놨다.'


비웃음을 입에 머금고 앉은 뱀니의 귀에, 문득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이 녀석아. 방울이가 눈앞에 아른거리니까 헛소리가 다 들리는 모양이구나."

"그 미친 뱀새끼보다 제가 먼저 잡을 거예요! 범의 가죽을 벗겨 들고 가서 그 우에 방울이를 뉘일 거예요."

"껄껄껄, 우리 털보가 다 컸구나. 네가 잡으면 당연히 그래야지. 지 할애비가 뱀 알에서 태어났다고 믿는 멍청이한테 방울이는 아깝거든."


이 말을 들은 뱀니는 자리에서 스르르 일어났다.

허리춤에 찔러둔 칼을 꺼냈다. 밤새 벼린 돌칼이었다.


범은 어지러운 듯 고개를 까딱까딱했으나, 아직 모가지에 힘이 남아있었다.

연신 그릉그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남의 오금을 쥐어짜는 낮은 울림이었다.


사아아- 스으읍- 사아아-


뱀니는 혀를 내밀고 천천히 숨을 뱉었다.

그리고 침을 코에 발라 들이쉬며 범의 냄새를 맡았다.

큰싸움을 앞둔 배암골 송곳니에게만 전해지는 숨쉬기였다.


'지금 구덩이로 내려가면 목숨이 위험하다.'


뱀니의 모가지를 펄떡펄떡 달리는 어머니뱀의 피가 알려주고 있었다.

머릿속에 어머니가 잠깐 스쳐 지나갔다. 내가 죽으면 또 시냇물 같은 눈물을 흘리실 어머니.


그러나 뱀니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머릿속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얼른 지우고, 방울이를 떠올려라. 예쁜 방울이, 나를 기다리는 고운 방울이.

이제 시간이 없었다.

웅성대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뱀니는 가래 끓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런 건 뱀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자기보다 큰 짐승을 삼키고도 탈이 나지 않는 건 오직 뱀뿐이지."


그릇에 남은 방울뱀 침을 모조리 칼에 발랐다.

누런 뱀침이 칼날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뱀니는 칼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입을 벌려 한 방울을 받아 마셨다. 죽음을 앞둔 배암골 송곳니들만 거치는 일이었다.

뱀니는 이를 부드득 갈며 침을 삼켰다.

그리고 나지막이 뇌까렸다.


"구리칼은 필요 없어. 범의 목덜미 위에 뛰어내려 내 이빨을 박아 넣을 것이다. 이건 뱀만 할 수 있는 일이야. 나는 어머니뱀의 피가 누구보다 짙게 흐르는 배암골 으뜸 싸움꾼, 뱀니다."


사아아- 스으읍- 사아아-


깊은 숨을 뱉은 뒤 치뜨는 뱀니의 눈동자는, 세로로 찢어져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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