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너무 자주 말해왔고,
너무 쉽게 약속해 왔으며,
너무 확신하는 듯 말해온 단어.
그러나 정작 ‘천국이 무엇이냐’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진실했는가.
많은 신앙인들에게 천국은 죽음 이후에 가는 보상의 공간이다.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고, 영원한 평안이 흐르는 곳.
믿음의 여정을 마친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혹은 절대자의 상급.
그 천국은 진주문과 황금길, 백보좌와 찬송의 노래로 꾸며져 있다.
그러나 그런 천국을 바라보다 문득 질문이 인다.
그 천국은 정말 하나님의 나라일까,
아니면 인간의 욕망이 그려낸 위안의 풍경일까.
가난한 이들이 가득한 이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이름조차 잊힌 역사 앞에서,
그 모든 것을 ‘천국에서의 보상’으로 위로하려는 시도는 과연 정당한가.
나는 천국도 원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
흙으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러나 그 흙을 지으신 하나님, 혹은
그 존재의 기원을 품으시는 신성(神性)을 떠올릴 때,
나는 생각한다.
그 무(無)마저 기억하실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여전히 나를 품고 계시리라.
천국보다 더 간절한 것은, 그 하나님과의 관계다.
혹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절대자와의 연결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다.
그분에게 천국은 죽어서 가는 저편의 장소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내야 할 신적 질서, 존재의 연결성, 관계로 구성된 생의 방식이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자는
가난해도 천국을 살고, 고통 가운데서도 평화를 안다.
그 삶은 죽음을 넘어도 이어진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사는 사람이 죽음 이후에도 그 관계 안에 머무는 것.
이것이 내가 믿는 천국이다.
보상의 공간도, 형벌의 반대말도 아닌, 신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존재의 상태.
천국은 지금 여기,
기도하는 식탁 위에 있을 수 있고,
눈물 흘리는 이의 손을 잡는 순간에 피어날 수도 있다.
천국을 말하면서 지옥을 함께 말하는 습관에도 경계해야 한다.
지옥은 불타는 형벌의 장소라기보다,
신과의 단절, 사랑 없는 삶, 자기중심성에 갇힌 영혼의 고립된 상태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지옥을 걷고 있고,
또 어떤 이는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천국을 품고 살아간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정말 존재하는가?
나는 모른다.
그것은 내 신앙의 영역이지만, 동시에 내 인식의 바깥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절대자는 지금도 살아 있으며,
나의 존재를 감싸는 이 신비한 관계는 지금 여기서도 가능하다.
그 연결이 끊기지 않는 한, 나는 천국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천국을 너무 쉽게 약속하지 말자.
천국을 입에 달고 살며, 지옥 같은 현실엔 눈감는 자가 되지 말자.
천국은 선언이 아니라 삶이다.
그 삶이 진실하다면, 그 어떤 죽음도 그 삶을 끊어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오늘, 천국을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천국을 살아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