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중 일부만, 그러나 진리의 파편

아니 에르노의 사실주의 소설들을 읽고

by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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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을 차례로 읽었다.
『사건』, 『바깥일기』, 『탐닉』, 『집착』, 『빈 옷장』, 『사진의 용도』까지.
사실주의라 불리는 그녀의 글쓰기는,

마치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작은 틈을 통해 바깥 풍경을 훔쳐보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를 기록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기록은 언제나 사실의 일부만 박췌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에르노의 사실주의는 진실에 접근하려는 치열한 시도지만,

결코 모든 것을 담아내지 못한다.
우리 삶이 그렇고, 기억이 그렇듯,

그녀의 기록도 부분적 진실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인간이 진실이라는 이름 아래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내가 붙든 신학,

내가 이해한 말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진리’라 말한다.

하지만 실은 그 중 대부분이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일부일 뿐이다.
그 작은 조각을 지나치게 절대화하는 순간,

신앙은 살아 있는 길이 아니라 고집이 되고,

타인을 향한 정죄가 되고,

나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진리는 완전하지만,
그 진리를 담아내는 인간의 인식은 늘 파편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알고 있는 것 너머”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오늘 내가 붙든 진리의 조각은 내일 더 넓은 진리의 부스러기에 의해 수정될 수 있다.
믿음은 절대적인 확신보다, 절대적인 진리 앞에서 겸손히 열린 상태로 서는 것에 더 가깝다.


에르노의 소설을 읽으며 자꾸만 이런 고백이 떠올랐다.
“내가 안다고 믿는 것도, 결국은 진리의 파편일 뿐이다.”

그러나 그 파편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작은 파편을 통해 우리는 더 큰 진리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믿음의 여정은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는 길이 아니라,

조각난 진리들 속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조금 안다.
내가 붙들고 있던 확신의 일부가 부서질 때,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더 넓은 진리의 세계로 초대받는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파편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향해 조용히 다가오고 계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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