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긷는 인문 13

by 이광수


15분도 채 안 걸리는 뭄바이 앞 바다 섬 엘레판타를 가려고 배를 탄다. 정원이라는 개념이 없는 듯 하다. 그렇지만 인도에서 그런 건 이미 체념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배에 오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실로 내려갔지만, 아직 갑판에서 선실로 내려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배가 출발한 후에도 대충 어중간하게 서 있다. 선실에서 그들을 향해 눈을 돌리자 무슬림 두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왼 쪽은 무슬림 남성이고 오른 쪽은 무슬림 여성인 걸 보니 아마 부부인 듯 하다. 왼 쪽 남자 얼굴을 보니 오른 쪽 여자 얼굴이 가늠된다. 나이가 꽤 된 여성일 것이다. 굳이 부르카를 쓸 필요가 있을까? 저 나이에도 저걸 써야 하는 혹은 쓰게 만드는 전통이란 무엇일까?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얼마나 평화를 추구하는 지 잘 안다. 마찬가지로 의미가 형해화 되어 사라지고 형식이 기계화 되어 사람을 얼마나 짓누르는 지도 잘 안다. 그래서 저 부르카를 볼 때마다 대개 만감이 교차한다. 전통이라는 게 원래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경우가 과연 있을까 싶은 생각에 씁쓸해진다.


순간, 위에서 내려오는 사내가 둘의 사이를 정확하게 갈라버린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구도가 완벽하게 3등분 된다. 위에서 내려오면서 마땅히 서 있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사내가 손으로 위를 잡으면서 둘은 완전히 갈려버린다. 저 우람한 팔뚝으로 완연한 경계를 지어버린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불쑥 개입해 남의 세계를 둘로 쪼개버린 저 사내는 힌두 남성이다. 처음에 여성의 부르카 때문에 저들의 정체성을 이슬람으로 규정해버린 나의 판단이 저 사내의 이마에 그려진 표지로 무슬림과 힌두로 나뉘어진 세계로 강하고 진하게 명토 박아진다.


세계가 이런 것일까? 본질로는 전혀 갈라지지 않는 세계가 아무 의미 없는, 그것도 한시적이고 덧없는 것으로 갈라지기 일쑤다. 실제 공간에서는 갈라진 게 아님에도 사진에서는 갈라진 것처럼 나타나듯, 실제에서도 본질적으로는 갈라진 것이 아님에도 남들의 편의와 공동체의 선을 위해 갈라진 것으로 치는 폭력이 얼마나 많은가. 종교가 그렇고 민족이 그렇고 국가가 그렇다. 그러다 보니 상징물 하나가 어느 누군가의 본질을 과도하게 대표하고 그로서 비롯된 폭력이 비일비재하다. 상징은 일반화고 일반화는 폭력이다. 저 늙은 부부가 처음 내 눈에 들어올 때 부르카로 들어왔고 그것은 이내 나로 하여금 저들을 무슬림이라 규정하게 만들었고, 그 위에서 새로운 공간 침입자는 힌두로 인식하게 된다. 이마에 표지가 없더라도 나는 저 이를 힌두로 표지하려 하였을 것이다. 정체화라는 무서운 일임에도, 내가 아주 싫어하는 일임에도 나는 서슴없이 그 일을 저지른다. 비록 마음속에서라도...정체성은 종교로만 이루어지는 것인 아니어야 하는데도, 적어도 인도에서 요즘은 종교로 이루어지는 게 많다. 다른 특질들이 간즌 복합 정체성'들'은 많이 약회되었다. 종교 공동체로 정체성이 단일화 되고 일반화 되는 것은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내가 안다는 것은 내 스스로가 안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 동안 쌓아 놓은 지식이나 그와 유사한 어떤 지적 현상들이 모여 나로 하여금 안다고 만드는 것인가? 그 안에 내 스스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 늑대는 달을 보면 어우웅 하고 울부짖는다는 것은 사실인가, 편견인가? 캄보디아 사람들은 웃는다, 과연 그런가? 부르카는 감추려는 것이다. 그것은 이슬람의 대표적 표상으로 굳혀져버리면서 이슬람은 폐쇄의 이미지로 굳혀져버렸다. 일반화는 오류다.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 신화일 뿐이다. 인도 사람들은 어떻고, 전라도 사람들은 어떻고, 여자는 어떻고...무엇은 선이고 무엇은 악이고, 심지어는 사진을 어둡게 찍는 사람은 어떻고 사진을 흔들면서 찍은 사람은 어떻다는 말들마저 하곤 한다. 역사는 반복한다, 라고 하는 따위의 규정 또한 마찬가지다. A와 B의 공통점은 이러이러 하다, 라고 하는 인식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것은 없다. 모두 일반화의 오류다.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불완전한 인식이다. 세계는 닮았듯 다르고, 다르듯 닮아 있다.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는 진정한 앎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현상이든, 그것만이 갖는 독특성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같은 점을 인식하여 그들을 '우리'로 삼으려는 것보다는 그 '우리'에서 벗어나 '나'라는 개체로 인식하는 것이 좀 더 사람 사는 세상에 가까운 인식 형태는 아닐까? 사람이 하늘이다, 라는 말.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좁쌀 안에 우주가 들어 있다, 라는 말이나 우주의 본질이 한 개체의 본질과 동일하다고 하는 고대 인도의 현자들이 설파하는 우파니샤드 세계관도 이와 같은 것은 아닐까?


숨과 태양은 같은 것이니, 숨도 뜨겁고 태양도 뜨겁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숨이 움직인다고 말하고 태양도 움직여 돌아온다고 말한다. 이 둘은 자리하고 있는 위치가 다를 뿐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찬도기야 우빠니샤드》

13.JPG 인도, 마하라슈뜨라, 뭄바이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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