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하늘이고 물이 생명인 곳, 실재가 신화에 의해 만들어지고, 신화가 다시 실재를 만드는 곳을 찾아 간다. 그리고 일단 카메라를 들지 말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걸어보자고 되뇌며 강을 따라 걷는다. 성스러운 곳이라고들 하는데, 내 눈에는 그다지 성스랍게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 펼치는 그 수많은 장면들, 힌두 세계에서 익히 보아온 것이어서 별로 속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별로 놀랄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의례들로 구성된 장면들이다. 강에서 펼쳐지는 그 사시사철의 그저 그런 풍경들보다 차라리 강가를 따라 조성된 가트ghat 계단들에서 펼쳐진 만화경 속에서 접하는 사람 사는 세계가 더 흥미롭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 성스럽다는 장소 안에서 웃고, 먹고, 떠들고, 팔고 사고...꾸역꾸역 살아가는 그 삶이 더 성스럽다.
순간, 물속에 떠 있는 것도 잠겨 가는 것도 아닌 한 신상이 눈에 보인다. 신상은 물 밖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잠기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스치듯, 그런 감정이 들었다. 왜 그런 감정이 들었을까? 연신 잠겨가는 모습이, 물이 흐르면서 때로는 그 물이 많아지고 때로는 적어지면서 그 상이 물속에 잠기다 떠오르고, 또 잠기다 떠오르는데, 꼭 잠겨버릴 것 같은 그 철렁거림이 왜 안타까웠을까? 어느덧 저 사람들 세계에 나는 동화되어 버린 것일까? 상태란 잠겼다가도 떠오르고, 떠오르다가도 결국 잠겨버리는 것일 텐데...
저 잠기고 떠오르고 하는 것과 전혀 무관한 공간, 바로 내 눈 앞에 한 여인이 있다. 저 신상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다른 존재다. 그런데 그 둘을 함께 보고, 한 공간으로 넣어버리는 것은 사진가의 눈이다. 사진가의 기괴한 눈으로 그 둘은 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세계 존재라는 것이 홀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다른 것과의 인연으로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라면 별로 무리일 것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세계 내에 존재하는 것은 자신이나 타인의 의지나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다. 어떤 행위를 하든 가에 그것을 행하는 자가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다른 어떤 행위를 하는 사람과 아는 듯 모르는 듯, 파악이 가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관계 안에서 서로 서로 연결된 결과다.
누구든 자신의 행위를 자기 의지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언뜻 자신의 의지와 힘에 의해 뭔가가 추동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그 행위를 둘러싼 엄청난 분량과 크기의 보이지 않는 우연의 요소를 고려하지 않아서 하는 소리 일뿐이다. 심지어는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 역시 자기 고유 의지대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 존재조차 주변의 수도 없이 많은 조건들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터진 자동차 사고, 지하철에서 아무 관계없이 연루되어 버린 추행 사건, 북미회담의 타결 불발로 인한 과음과 건강 악화, 환절기에 발생한 장인어른의 건강 악화, 괜한 구설수로 인한 위원장 사퇴와 그로 인해 연기된 미팅 등은 적절하든 적절하지 않든 내가 우연히 그 시각에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난 일일 뿐이다. 모두 나의 의지 문제가 아니다. 그 힘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세계 내 존재는 그들끼리 뭔가 밀고 당기는 힘이 존재한다.
사진가는 그래서 그 힘을 활용하기를 즐긴다. 억지로 보는 것, 그것은 이성과 기획의 힘만을 믿는 일차원적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다. 난, 지금은 관계없는 공간이란 없다고 보는 사진가다. 그렇게 보이는 공간들을 서로 당겨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게 자연의 법칙에 그리 어긋난 것은 아니다. 저 강가에서 존재한 두 공간, 그 가운데 당겨진 하나의 공간 안에서 애초부터 가만히 있는 상은 여인의 무의미한 동작을 유의미한 의미로 해석한 사진가에 의해 ‘잘 가시오.’가 된다. 사진에서 사실과 해석은 사진가와 독자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원히 멈추지 않는 파동의 관계에 있다. 여기에서 파동이란 시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그 처음과 끝이 없는 그런 것이다. 마치 파도의 움직임처럼 말이다. 그 어떤 곳에서도 시작되지 않았으며 부딪혀 부서질 해변도 없는, 그런 끝이 없는 파도 말이다. 사진을 하고, 읽고, 감상하는 것은 해석을 반대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진 예술은 해석과 진실 사이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독자의 해석 속에서 신상은 더욱 더 물속으로 잠긴다. 사실과 관계없이 마음으로 보는 것이 그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 삶이라는 게 ‘잘 가시오.’이고, 삶이라는 게 잠겨버리고, 사라져버리는 것이겠지. 삶은 사는 것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것이니까. 이 사진을 읽는 사람이 이렇게 읽는 것은 그렇게 큰 무리는 아니다. 그것은 자연 안에서 살아나가는 또 하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고대의 우주 운항 법칙일 것이다.
단지 자신의 행동은 인식하지만 그 행동을 결정한 원인을 모르는 것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스피노자 《에티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