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긷는 인문 2

by 이광수

내가 그곳을 찾아간 것은 겨울이지만, 그들에게는 여름이다. 내 안의 시간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 사방에 핀 꽃이 새삼스럽다. 그곳은 항상 여름이니 항상 꽃이 피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 자연스러움이 확 깨는 것은 그 여름이 내게 부자연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간은 내 중심으로 흐르는 게 아닌데, 꼭 그 사실을 잊고 산다.


히말라야에서 내려온 땅이 평원을 지나더니 느닷없이 융기하여 반도가 시작되는 곳. 솟구친 고원이 바다를 향해 달리는 인도 데칸 고원에서 어느 하루를 보낸다. 데칸고원의 시작 포인트에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그곳에서 40년 전 그 상하常夏를 되새긴다. 볕이 하도 좋아 온 종일이라도 돌아다니려다 어느 새 더위에 지쳐 그 좋은 볕 아래 그늘에 쉬러 간다. 허름한 벤치에 앉아 쉼을 청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땀을 닦고,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시간. 무슬림 소녀 넷이서 내 눈 높이 위로 지나간다. 서서 돌아다니면 잡을 수 없는 모습, 까만 히잡hijab을 두른 네 소녀가 내 눈 위를 걷는다. 까만 히잡들이 걷는 장면이 나를 자극시키고, 순간 셔터를 누른다. 순간 앞에도 있고 바로 위에도 있고 저 멀리 언덕에도 있는 꽃을 프레임 안에 얼른 집어넣는다. 히잡과 교묘한 대비를 노린 것이리라. 왜 난, 꽃이 히잡과 대비된다고 생각했을까?


히잡 넷이 걷는 게 이미지로 내 눈에 들어오는 건 괜한 섣부른 역사 의식 때문이다. 셔터를 누른 찰나가 지난 뒤, 존재하는 실재는 내가 보는 이미지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게 그 본질은 아니다. 눈은 이미 배운 바, 익힌 바, 얻어 들은 바 자신에게 박힌 고정 관념에 따라 보는 뇌의 하수인일 뿐, 눈이 독립적으로 자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눈은 스스로 볼 수 없다. 소녀들의 깔깔거림은 여느 청춘의 웃음소리 그것일 뿐, 아무런 새삼스러울 게 없는데도,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세계는 그렇게 그대로인데, 내가 재단하고, 판단하여 규정 짓는다. 그리고 거기에 거창한 의미도 부여하곤 한다. 히잡이라는 게 이슬람이고, 이슬람이라는 건 핍박의 이미지로 어느덧 내게 굳어져버렸다. 그 거시의 세계가 미시의 세계까지 규정하지는 않을 텐데, 그 사람들은 항상 이슬람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텐데, 난 그렇게 본다. 내게 아름답다고 해서 세계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요, 내게 놀랍다고 해서 세계가 놀랄 만 한 것도 아닐 텐데. 내 뇌는 그 단일하게 만들어진 세계에 익숙해져 있고 그 눈은 거기에 따른다. 사진 세계는 그냥 평범한 세계에 의미를 짓는 게 많은 곳이다. 세계는 그런 이미지로 사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세계에 이는 갈등은 결국 보편에 대한 과도한 바람 때문이 아닐까. 신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과한 기대가 미움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까. 거기에서 사랑은 나의 사랑이 되어야 하고, 내 방식의 사랑이 되어야 하고, 나의 사랑이나 내 방식의 사랑이 아니면 사랑의 대상이 금세 미움으로 착종되다가 결국 미움을 지나 혐오로 굳어져 버린다. 사랑이 미움이 되는 본질은 보편이고 그 보편의 중심은 ‘나’가 되는 이 기막힌 도착. 그 희한한 법칙 안에 다름에 대한 미움과 혐오가 깊게 뿌리 내린다. 어떻게 보편이 강요를 낳고, 사랑이 혐오를 낳는가? 그 속에서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면서 살다 보니, 그 피해 대상 옷차림만 봐도 깜짝 깜짝 놀란다. 좀 더 담대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이 또한 불안의 근원임을 알지만, 쉬 해결할 수가 없다.



김준태


어디로

가야 길이 보일까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어디에서 출렁이고 있을까

더러는 사람 속에서 길을 잃고

더러는 사람 속에서 길을 찾다가

사람들이 저마다 달고 다니는 몸이

이윽고 길임을 알고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기쁨이여

2.JPG 인도, 까르나따까 벵갈루르,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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