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나라라기에 간 건 아니고, 그들이 말하는 행복의 모양새가 어떤 지를 보고 싶어서 그렇게들 말하곤 하는 부탄Bhutan을 찾았다. 그리고선 그들이 껴안고 사는 행복의 모습을 돌아보고 다녔다. 그들이 행복이라 말하는 것, 만들어진 것일까, 실재일까? 무욕일까, 아니면 아직 욕이 뭔지를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욕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욕을 부리는 것을 죄로 여겨서 그런 것일까, 그도 아니면 욕을 억누르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대대손손 그 어떤 이의 가르침에 배우고 익히고 박혀서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은 몰려오는 물의 욕을 거부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그 기회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왔다 하면 그들도 우리처럼 그 물욕의 난장에 흥청망청 하거나 결국 살육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그냥 그들의 삶의 모양새를 외부자로서 보고 싶어서 갔다지만, 난 어느새 그런 단순한 외부자로 있을 수는 없었다. 하릴없이 산보하면서 대상과 존재 간의 관계를 주체적으로 맺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 대상에 대해 초연하지 못했고 그러기에는 그 대상에 대해 관심이 너무 많았다. 더군다나 나는 카메라를 메고 다닌다. 그냥 어슬렁거리기에는 도저히 적합하지 않는 도구다. 카메라는 눈이 없다. 다만 내 눈이 카메라로 옮겨질 뿐이다. 여기에 나라는 사람은 이미 그들의 세계에 대한 평가와 규정을 해버린 나의 이성과 지식에 의해 통제되는 사람이다. 그 이성이 장수로 앞장서니, 감각은 그 뒤를 따라가는 병졸이 될 뿐이다. 따라가는 것, 무심한 짓이다. 영혼 없다고들 하는 그 무심한 짓 말이다.
난, 카메라라는 무기를 들고 행복이라고들 말하는 남의 삶의 공간에 침입하는 포식자가 된다.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칭하는 그 어쭙잖은 이성으로, 사람을 작게 만들어버리고, 종을 거대하게 만들어 찍어 누르는 곳에 위치 시켜버리고, 그들을 앉히고 그 위에서 억압하는 형상으로 박제해버린다. 그도 부족하여 그 종에 그려진 온갖 문양은 화려하기 그지없고, 색은 주변의 모든 존재와 더불어 화려한, 그래서 당신들도 그 색즉시공의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할 뿐 아닌가, 라는 언어로 덧붙여 씌어버린다. 종 아래에서 행인지 불행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또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들의 세계가 나의 이성의 눈에 의해 종교에 의해 찌들고, 인간에 아직 눈 뜨지 못한 세계로 박제되어 버린다. 난,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이것은 의식의 과잉인가? 의식을 대동한 판단은 냉정한 것인가? 냉정하다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성의 개입을 배제할 수는 없는가? 만약, 배제할 수 있다면, 판단을 유보할 수는 있을까? 직관으로 파악하는 그 세계는 깨달음인가 이해인가? 그 세계가 가능하기는 하는 것일까? 철인의 세계에서가 아닌 우리 범인의 세계에서 말이다.
행복의 나라에 가서 그 행복에 대해 이리저리 난도질만 하고 돌아온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이제 책도 그만 읽고, 생각도 그만 하고, 글도 그만 쓰고, 그냥 느낌으로만 살자, 고 되뇌는 것은 하루 저녁 몽상만도 되지 못한다. 다시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그리고선, 또 다시 이성과 지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 해 여름은 그렇게 무겁게 갔다. 히말라야 자락을 억누르는 몬순 구름처럼...
감각보다는
대상이 먼저 생겼고
그 대상보다는
마음이 먼저 생겨났으며
그 마음보다는 지혜가
그 지혜보다는
아뜨만Atman이 더 먼저 있었다.
〈까타 우빠니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