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긷는 인문 4

by 이광수

다 허물어져 간 옛 사원을 찾았다. 돌을 나무마냥 깎고 갈고 새겨 만든, 수도 없이 많은 신전과 신상들. 그 앞에 한참 서서 흔적이라는 것을 바라본다. 한창 살아 있는 북적거리는 사원보다 훨씬 쉽게 어떤 감흥에 젖게 되는 것은 비단 시간이라는 슬픈 매개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난, 시간 앞에 허물어져 간 그 곳에서 옛 사람들의 신심은 읽지 못한다. 눈으로 들어와 뇌를 때리는 것은 시간에 대한 고작 숱하게 듣고 익혔던 역사학의 클리셰 뿐이다. 시간 앞에 허물어지지 않는 건 없다는, 역사가 시간에 물 들면 신화가 된다는, 남들도 다 겪는 크로노스와 내가 겪는 카이로스라는, 그런 종류의 남들이 말하곤 하는 시간에 관한 그 클리셰 말이다. 신을 모신 사원 앞에서 신을 모시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잔잔함에 관한 소리는 귀 기울이지 않은 채 난, 여지없이 카메라의 사각 프레임 안으로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 것인가에만 몰두한다. 그 클리셰에 맞추는 분위기는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에만 몰두할 뿐, 정작 이곳에 온 이유를 찾지 못한다. 카메라를 가지고는 본질을 사유할 수 없다. 아니, 본질은커녕 시간도 공간도 인간도 사유할 수 없고, 관계도 사유할 수 없다. 카메라는 사유하는 인간의 적이 되는 셈이다.


뜬금없는 것이 자연에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들게 하는 신상이 눈앞에 서 있다. 우연과 돌발만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어느 포스트모던 철학자의 언술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모든 것이 같은 모양을 갖게 되고, 그 결과 같은 톤과 같은 색으로 바뀌어버린 유허 안에 웬 천연색 밝게 붉은 신상이 턱 하니 서 있기 때문이다. 참 뜬금없는 짓이다. 옛 것이 이미 신의 본질을 재현하는 것임에도, 사람들은 그 위에 또 새로운 지금 것을 갖다 세워놓는다. 신을 재현하는 것도 결국 인간의 패션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 생경함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갖다 댄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내 카메라를 유혹한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자연이라면, 자연이란 어디까지 ‘있는 그대로’일까? 자연에 순수함이라는 게 가능할까? 인위적으로 간섭하고 개입하는 것을 배제하는 자연이라는 게 가능할 거냐는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원숭이 하누만Hanuman 신상은 우선 그 붉은 것도 노란 것도 아닌 힌두 근본주의자들이 택한 극우 수꼴 난동의 색 사프론Saffron 색깔로 튀어나온 것이라 눈에 급하게 띈다. 그것은 이미 내가 세계를 본질로 보지 못하고,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리라. 현상만 좇는 것은 본질을 파괴하는 시도가 될 수밖에 없다. 그 파괴는 보존과 결합되지 못한 채 새로운 창조를 향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파괴가 아니라 극복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지. 그럼에도 새로움에 만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그 지향성은 특정 담론에 의존하려는 것은 아닌지. 낯섦에 대한 동경에 목매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은 또 생각을 낳고, 또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고. 저 뜬금없는 신상 앞에서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다. 그런데 그 사념의 뿌리가 저 색이 주는 생경함이었다니, 고작...


카메라로 만든 이미지에는 그 대상에 면면히 이어져 오는 여일함이 없다. 밖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저 안 어디에선가 수 백 년 동안 – 어리석든 어리석지 않든 – 흘러내려온 그 면면함 말이다. 사진이라는 것이 본래 그런 것이라 그렇다. 사진이라는 게 무엇인가? 사진은 한때 그 시간 그 자리에 존재했던 어떤 대상을 그곳으로 들어갔다 나온 빛을 통해 필름 혹은 CCD에 자취를 남기는 것일 뿐이지 않는가. 죽어서 만들어진 그 이미지를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꾸며대야 하는 것이 본질 아닌가. 거기에서 한 술 더 떠, 그 안에 창조성까지 넣어 어떻게든 본질을 가진 것처럼 만들어내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뜬금없는 탈(脫)문법의 화두로 자리 잡는다. 생경함이 수단이 되더니 때로는 목표까지 되어 버린다. 그 생경함으로 구성되는 그 이미지의 드러남만 보여줄 뿐이다. 그것이 예술이고, 그 예술성을 지향하는 것이 작품이고, 사진하는 사람으로서 지향하는 것이 그 작품성이라는 것이라면, 그 작품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난, 저 생경함을 드러내서 도대체 뭘 하려 하는 것일까?


숨겨져 있는 것, 접근 불가능한 것, 비밀스러운 것과 같은 부정성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과도한 가시성은 외설적이다.

한병철 《투명사회》

4.JPG 인도, 마디야 쁘라데시, 그왈리오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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