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진가가 사실이라고 믿고 장면을 포착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그의 해석에 입각해서 재단하는 것이다. 그것을 과학이고 증거라 주장하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지만, 모든 사진을 그렇게 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제는 사진가가 해석의 눈으로 카메라를 들이댔는지, 증거를 남기기 위해 들이댔는지, 그것부터 먼저 파악해야 한다. 사진가의 해석과는 달리 사진에 나타나지 않는 진실은 얼마든지 있다. 그 역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사실이든 진실이든 해석이든 그 모든 관계는 카메라를 든 사람의 눈에 달려 있다.
다른 나라 특히 인도 같이 우리 문화와 크게 다른 곳을 여행하면서 거리 사진을 찍는 사진가들에게 평소에 접할 수 없는 이벤트를 만나게 되는 것만큼 행운인 것은 없다. 만일 누군가 암소를 실수로라도 죽인 사건을 접하게 될 때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여행 일정 다 포기하고, 그곳에 머물러 그 불행의 이벤트가 준 행운을 만끽할 것이다. 그렇지만 언감생심, 사실, 이런 기회는 평생 만나기 어렵다. 이런 종류의 이벤트 가운데 그나마 자주 접하는 게 결혼식이다.
학살의 현장을 찾아보러, 강에 도착할 무렵, 신부 시댁 사람들이 강가에 무리지어 모여 있음을 본다. 신랑은 싱글벙글이고 신부는 얼굴 가리개 스카프를 한 번도 벗지 않는다. 부끄러워야 함이 뭔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신부는 사실 그가 부끄럽든 그렇지 않든 반드시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것이 도덕이고, 그것이 정숙한 여인네의 처신이며, 그렇게 해야 복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러니 그 둘, 부끄러운 것과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 그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지역전문가 연구자라면 이 차이를 잡아내야 한다. 그런데 사진가는 그런 부담이 없다. 그렇지만, 그 차이를 잡아내지 못하면 그것은 그냥 단순한 여행객의 시선으로 만든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그 차이를 잡아내려면 그곳에 적어도 며칠이라도 묵어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속들이 사정을 들으면서 그 분위기를 기록해야 한다. 그런데 이 장면 앞에 선, 난, 그렇게 하지 못한다. 단순한 여행객이라 그저 겉만 포착하는 장면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사진이 기록의 다큐멘터리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이런 이미지는 또 다른 어떤 의미로 전유하기도 어렵다. 누가 보든 스트레이트로 기록성이 강한 사진이기 때문이다.
어떤 문화든 속과 겉이 있다. 속만 보고 겉을 파악하는 것은 만용이지만, 겉만 보고 속을 파악하는 것은 폭력이다. 사진가 특히 여행객으로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그 폭력성을 조심해야 한다. 자신이 본 것은 사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일 뿐,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진실이란 사실을 두고 해석과 해석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다. 해석이라는 것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고 난 뒤 일어나는 추후의 사건이 아닌 것이다. 경험계에 대해 종속되어 있는 부차적이거나 2차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 혹은 대상에 대해 해석하기 이전에 그것을 이미 해석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그 위에서 경험한다.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진 혹은 만들어진 해석을 우리는 그저 받아들이고 경험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해석은 주체적이라 할 수 없고 선험적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 해석이라는 행위는 피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 그 해석이라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세계가 완전히 객관적이거나 과학적인 혹은 필연적으로 명료한 상태에 놓이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하기 좋게 시간과 가시성이라는 것을 놓고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밤으로만 지속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명료하게 보이지 않으니 온갖 해석이 난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와는 달리 낯만 지속된다고 생각해보자. 그 경우에는 모든 것이 명료하게 보이니 해석이라는 게 필요 없고 모든 것이 명료한 과학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시간과 가시성의 세계와 같이, 우리의 경험계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 명료함과 모호함으로 섞여 있는데, 때로는 그것이 파동이나 물결로 교차해서 다가오고, 때로는 무지개 같이 나눌 수 없이 번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모자이크 같이 섞여 있어 불분명하기도 한다. 그것은 경계가 사라져버린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경계로 나뉘는 것도 아니다. 안과 밖이 불분명하면서 서로 섞여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내용이 형식을 만든다고 하지만, 사실은 형식이 내용을 창출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경험계다. 전자가 우월하고 후자는 열등하며, 전자는 성스럽고 후자는 속된 것이 아니다.
사진은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진가가 사실이라고 믿고 장면을 포착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그의 해석에 입각해서 재단하는 것이다. 그것을 과학이고 증거라 주장하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지만, 모든 사진을 그렇게 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제는 사진가가 해석의 눈으로 카메라를 들이댔는지, 증거를 남기기 위해 들이댔는지, 그것부터 먼저 파악해야 한다. 사진가의 해석과는 달리 사진에 나타나지 않는 진실은 얼마든지 있다. 그 역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사실이든 진실이든 해석이든 그 모든 관계는 카메라를 든 사람의 눈에 달려 있다.
흔히 사실은 스스로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진실이 아니다.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할 때에만 이야기한다. 어떤 사실에 발언권을 주고 서열이나 차례를 정하는 것은 역사가다.
E.H.카 《역사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