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사진을 찍다 보면, 주제는 얼추 정해놓고 작업을 시작하지만, 그게 아주 성긴 그물코 같아서 그로부터 벗어나버린 일이 자주 생긴다. 이런 경우 일단은 찍어놓지만, 명료한 주제 의식을 갖지 않은 채 셔터를 누르다 보니 구도를 비롯한 사진의 물성이 그냥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진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경우 특히 이런 장면을 많이 만난다. 교통 체증은 심하고, 거리는 말할 수 없이 복잡하고 시끄러운 게, 인도 도시의 풍경을 잡아내기가 참 좋은 소재거리가 무시로 눈앞에 펼쳐진다. 시외로 나갈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보는 게 여행하는 묘인데, 시내로 들어오면 카오스 같은 복잡한 인도의 도시가 고요한 사유의 세계를 가만 두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차창에 앉아 연신 카메라를 누른다. 지금 여기에서 하는 작업의 주제와는 거리가 먼듯 하지만, 그래도 넓게 볼 때 나의 큰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일단 셔터를 누른다. 그날, 그러 하였다. 인도에서 가장 복잡한 도시 가운데 하나, 깐뿌르Kanpur를 관통하는 시간, 마치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종류의 탈 것들이 전시를 하는 듯 모두 거리에 쏟아져 나와 있다. 차는 매연 안으로 찾아들어가는 듯, 몸은 피곤에 내동댕이쳐 지는 듯, 버스 차창을 통해 밖의 풍경에 무심한 눈만 던져져 있던 때, 한 노동이 내 눈 안으로 들어온다. 우연히 만나야 할, 어떤 필연이었다. 거부할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나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 사진은 항상 사람과 역사를 향하는 사진이다. 그 주제가 종교의 본질이든, 노동과 소외이든, 우울한 세기말 풍경이든 언제나 난, 사람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댄다. 카메라의 눈은 그것을 든 사진가의 눈에 따라 자유롭게 그 의지에 맞춰 규정되는 것이 옳다고들 한다. 카메라는 기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통제하고 조절하느냐의 시각에 따라 그 대상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법이다. 대상 가운데서 무엇을 보느냐의 선택이 중요하겠지만, 그 뿐만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 즉 어둡게 보느냐, 확대해서 보느냐, 흔들리게 보느냐 등이 다 그 카메라를 통제하는 사람의 시각에 달려 있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통제할 수 없다면?
버스 차창이 저 이와 나를 가로 막고 있으면, 그 버스 차창은 인간과 노동을 가로막는 칸이 되기에 적당하고, 술 취한 거리에서 카메라가 흔들리면 자본주의에서 흔들리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의 내러티브가 만들어질 수 있다. 사진 찍는 지점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자꾸 원치 않는 요소들이 장면 안으로 끼어드니, 그것은 역사에 필연적으로 작동하는 우연일 것이요, 차창에 먼지가 끼거나 기차 안 빛이 강하게 들어와 괴이한 형상이 중첩되면 그것은 우리 사는 세계가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모습으로 전유할 수 있다. 대상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상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그대로 받아들인다. 다만, 그 위에서 그것을 어떤 이야기로 만들어 낼 것인가를 정하면 될 일이다. 결국, 그 어떤 상황이든 큰 주제 안에서는 대상이 어떤 형태를 갖추든 개의하지 않는다. 그 상황이 나에게 충돌하여 나에게 생각을 일으켜 세웠으면 그것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사진을 찍기 전이든 후든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는 일이다. 문법이란 참조할 만한 대상일 뿐 따라야 할 규범이 아니다. 그것이 언어든 이미지든 모든 것은 살아서 움직이고, 그를 둘러싼 당위는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당위는 문법을 낳고 문법은 도덕을 낳다 보니, 그 도덕이라는 것을 따르는 게 항상 선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배제당한다. 문법과 도덕은 결국 배제를 위한 틀이 되는 것이다. 특정 집단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고안해서 만들고 관리하는 틀 말이다. 그리고 그 틀은 사회의 시공간에 맞춰 통용되는 담론으로 포장되고 체계화 되어 널리 유통되고, 그를 통해 더욱 강고한 힘을 갖게 된다. 그 틀에 순종하는 반듯함과 그 산물인 지성만 가지고 내리는 판단은 일부는 진실일 수도 있지만 그 바탕은 신화에 기대어 만들어지는 반(反)진실이다. 그것으로는 그 너머를 이해할 수 없다. 바로 그 너머에 주체가 있고, 예술이 있다. 사진을 이렇게 찍어라, 이렇게 읽어라, 이렇게 전시하라, 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틀에 박혀 이미지를 만들고 읽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이라는 이미지로 그 너머를 보는 것, 사유하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 그 세계로 들어가야 자유가 있고 인문을 만난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려온 그 문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전복의 발랄함이다. 사진을 하면서 파괴자 니체를 읽는 것은 바로 이 맥락에서다.
나는 필연적인 것의 아름다움을 더 더욱 많이 알기를 원한다. 그러면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 《즐거운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