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긷는 인문 7

by 이광수

사진은 대상을 박제하는 것이다. 살아 숨 쉬는 것을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죽인다는 의미다. 그 박제에 대한 의미 가운데 중요한 게 하나 있다. 시간성의 문제다. 사진은 대상을 찰나의 시간에 박제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진을 찍는 대상이 고정된 경우는 그 시간은 밝고 어둠에 관한 시간 변화 하나에 국한되어 박제가 되겠지만, 그 대상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 움직이는 대상의 동작과 시간과의 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그 사이에서 실로 다양한 관계가 맺어지고 그에 따라 결과가 나온다. 어두운데 움직이는 대상과 밝은데 움직이는 대상 혹은 어두운데 순간적으로 빛이 들어올 때 움직이는 대상과 밝은데 순간적으로 빛이 들어오거나 혹은 약해지는 대상 ... 그외에 대상과 빛이 조합해서 만드는 관계의 변수는 실로 다양하게 일어난다. 그 다양함은 빛과 시간과 동작이 카메라라는 기계를 만나면서 엮어지는데, 그 조합은 결국 우연이라는 필연에 뿌리를 둔다. 아무리 베테랑이라 하더라도 그 많은 다양함 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가 어떻게 나올 것일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만일, 나는 계산해서 찍는다, 사진은 한 컷 한 컷 치밀한 계산으로 찍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진가가 있다면 그는 대단한 기술의 소유자일지는 모르지만, 사진이 갖는 맛을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계산과 과학 속에서 우연이 주는 맛을 아직 보지 못했으니 하는 말이다. 안타깝다 할 수밖에 없겠다.


스리랑카 껠라니야의 불교 사원에 존치되어 있는 와불에 대해 경건하게 절을 하려는 사내가 먼저 두 손을 이마에 댔다. 그 수직적 동작과 와불의 수평적 자세가 될 듯 하여 미리 위치를 잡아놓고 적당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한 사내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가는 순간, 주저함 없이 순간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끊었다. 그리고 한참 뒤 만들어진 사진 이미지를 보니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표정이 사진 안에 나타난다. 렌즈의 포커스를 붓다에 맞췄으니 사내의 뒷 표정이 뭉개지고 별 감흥이 없게 된 것은 이미 노렸던 바지만, 붓다의 눈길이 사내에 대해 '어리석고 불쌍한 자여'라고 하는 듯한 애처로운 표정이 읽힌다. 전혀 짐작하지 못한 바다. 물론 나만의 주관적인 독해다. 그 표정은 빛과 카메라의 앵글과 거리의 조합이 만들어낸 우연한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다르고 기계를 통과해서 나온 이미지로 볼 때 다르다. 나는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저 표정이 나온 이 사진에 무척 마음이 간다. 붓다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서다.


어떤 대상이 항상 동일하게 보일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는 사람의 관점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본 그 현상을 옮기는 스타일에 따라 재현 결과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의미도 달라진다. 사진이라는 것은 우연의 요소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끼인다. 기계로 하기 때문에 통제 될 수 없는 그 우연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우연'을 무시하는 말을 하곤 한다. '오늘 한 장 건졌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무슨 금과옥조인양 후배들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난 결코 따르지 않는다. 이른바 '건지는' 것은 사진만의 특권이다. 어느 시인의 말을 패러디 하면, 사진은 팔 할이 우연이다. 우연은 합리성에 대해 든 반기다. 이를 서구적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신의 섭리 혹은 운명에 대한 저항이고, 인도적 관점에서 보면 우주 만물에 편재되어 있는 모든 신조차 종속되어야 하는 거대 법칙성에 대한 긍정이다. 그 발생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일 뿐, 그 원인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로선,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배제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우연을 배제한 채 운항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는가?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 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가 그린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7.JPG 스리랑카, 껠라니야,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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