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한 기록에 의미를 두고 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은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이 요구하는 기간만큼 작업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보다는 역사적 의미를 잘 담을 수 있는 장면을 주체적인 시선으로 선택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그 기간이 오래 되고, 사진이 오래 묵힌 것이 좀 더 감동적이고 가치 있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다큐멘터리 작업이라 하더라도 기록적 의미보다는 문학적 의미 즉 전유로서의 성격이 강한 경우는 작업에 대한 접근 태도가 달라진다. 후자의 경우 그 작업 기간이 며칠이 걸릴 지 몇 년이 걸릴 지 알 수 없고, 한 장 한 장의 사진 또한 찰나를 포착하여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사건 본래의 성격보다 이미지로 잡힌 어떤 특정 대상의 상징성이 강하게 드러나 해석되거나 사진가의 시각으로 전유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사진가의 의도는 직설적으로 들어나지 않고, 해석의 권한이 독자에게 넘어가 두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고 그래서 사진 읽기가 재미있어 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전자에 비해서 사진 가치의 생명력은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2017년 1월 인도 서부 사막 건조 지대에 있는 주 라자스탄을 찾을 때다. 관광지보다는 그 바깥에 사는 마을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 관심이 많은 터라, 주변에 사는 어느 불가촉천민들 사는 곳을 찾아갔다. 힌디어로 인사말을 하면서 너스레를 떠니 동네 아낙들이 호들갑을 떨며 내 주변으로 모인다. 이내 경계심이 풀려 한층 편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주변에서 관광객은 많이 봤으나 동네에 찾아 온 사람은 처음이라 한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눈인사로 허락을 맡은 뒤 카메라를 가방에서 빼낸다. 뭐 하면서 먹고 사냐고 물으니, 저 염소 목 쳐서 먹고 산다고 한다. 바로 이 아낙이 한 소리다. 뭘로 목을 치냐고 되 물으니, 이걸로 친다며 인도 사람들 특유의 과잉 친절의 리액션을 보여준다. 친히 도끼를 마당 옆에서 가져와 들쳐 맨다. 순간 잽싸게 셔터를 누른다. 초점 맞출 새도 없이 바로 누르다 보니 저 뒤에 무의미 하게 평상에 졸 듯 앉아 있는 나른한 청년에 초점이 맞춰져 버렸다. 내 의도는 초점이 도끼날에 있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니 실패한 사진이다. 기껏 해 봤자 B컷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과연 그러할까? 돌아와서 나중에 사진을 보니 꼭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겠다는 결론이 난다.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건 물론이고 도끼날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아낙의 표정이나 모습은 흐리고 뭉개져 색조도 괴이하다. 그렇지만,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가깝다. 초점이 맞춰지고, 그것도 내가 원하는 곳에 고스란히 맞춰지는 세상은 없다는 것이 내 작업의 주제다. 염소의 목을 쳐서 사는 사람들이 주제가 아니다. 세계는 경계, 범주, 우연, 주체, 정체성 등에 관해 이질과 불확실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 컷이 딱 제격이다. 세상사 자연이라는 게 항상 질서정연하고,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라는 생각으로 사진의 메시지를 맞추면, 이 컷이 바로 A컷이어야 한다.
인간의 위기는 속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형화에 있다. 시간을 길게 두고 세계 질서를 생각해보면 굳이 어떤 틀이라는 것을 상정하고 그 안에 맞출 필요가 없게 된다. 그 무엇이든지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 녹아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세월을 기다려 주지 않으려고들 한다. 그러니 어떤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코스를 정하고 그 코스를 이수하고 그런 사람을 마스터로 인증해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열을 가르고, 평가하고, 배제한다. 바야흐로 문법의 시대다. 시간은 자연을 낳고, 자연은 시간 속에서 마음껏 변화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는 방향으로만 흐른다. A의 형태가 나타나면 그것대로 이해하고 그에 맞춰 해석하면 되는 것이고, B로 나타나면 또 그에 맞춰 읽고 해석하면 될 일이다. 왜 C여야 하고, D여야 하는가? 지식도 아니고 학문도 아닌 문학으로서, 전유로서 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이 왜 어떤 틀에 맞춰야 하는가? 무엇 무엇이어야 하고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문법은 시간과 공간과 그 사이의 넉넉함을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난, 세계를 그렇게 본다.
틀이 정해진, 그 안에서 등위가 결정되는 속에서는 이야기가 자리를 할 수가 없다. 이야기, 그 삶을 나누는 최고의 소통의 길 말이다. 그 이야기가 사라진 틀 안에서는 속도와 효율은 더해지겠지만, 인간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삶의 향기를 내뿜는 것은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다. 그것이 완결성을 갖지 못하든, 창의성을 갖지 못하든 간에 관계없이 그 안에는 사람 사는 맛이 생기고, 그 맛을 서로 나누게 된다. 나누려면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걸리면 틀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결국, 느림의 미학, 여백의 미학은 기준이 없다. 결국, 사진에서 좋고 덜 좋고 안 좋고 혹은 나쁘고, 버려야 하고,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하고의 문제는 사진의 문제가 아니고, 가르치고 배우는 일과 시간과의 관계성에 관한 문제다.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 짧은 것은 늘여서도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환이 없어질 까닭이 없다.
《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