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정의(定義)
처음 접한 혹은 모호하고 복잡한 어떤 것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간단하고 빠른 방법은 그것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일 것이다. 통상 우리가 하는 이런 방식에 대해 철학자 니체의 생각은 다르다. 니체는 어떤 것을 정의 내리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짓이라 한다. 사실, 니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떤 것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구체적인 것에 대한 개별성과 특수성을 전부 없애버리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상황이 달라지면 성격도 달라지고,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또 달라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고 역사의 이치다.
게다가 뭔가 분명하게 정리되는 과학적 규정이 뭔가 복잡한 것까지 보는 철학이나 역사학적 규정에 따른 판단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과학에 의거하여 단일하게 정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현대인들은 과학에 의해 증명되고 명쾌하게 보이는 현상이 우월하다는 담론을 떠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시대 과학은 모든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근거로 자리 잡았고 그래서 권력의 토대가 되었다. 과학적이라 하면 논쟁에서 전가의 보도로 인정받았고, 증명하지 못하는 것은 만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제 우리는 과학이 신화로 작동하는 시대로 들어온 것이다.
그 안에서 현대인들은 특별한 것보다는 일반적인 것을 선호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사는 현대 사회의 성격과 더욱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행위는 사실, 궁극적으로 더욱 복잡해진 사회의 질서를 지키려는 행위의 일환이다. 평균의 가치에 수렴해서 그 기준으로 지켜지는 질서가 세워지면 그 평균이라는 것에 미치지 못하거나 너무나 다른 어떤 가치는 반드시 배제하고 강제로 솎아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사회에는 질서는 남지만, 인간은 사라지게 된다. 정작 인간답데 사는 공동체는 독특하고 개별적인 속성들을 부양하고 격려해서 다소 시끄럽고 어지럽고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다 같이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데, 그런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는 니체 특유의 무엇이든 단일하게 개념 짓는 것을 거부하는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대해 한 발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니체는 우선 어떤 시스템이라는 것을 거부한다.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인 ‘영원 회귀’를 기준으로 한 번 보자.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영원 회귀'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기본 개념을 더 진전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 뿐이다. 더 이상 깊이 있게 설명하지 않았다. 니체 스스로 '영원 회귀'야말로 자신의 여러 개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어느 자리에서도 그것을 쉽게 풀어 설명한 적이 없다. 여러 맥락을 살펴본 후 그의 뜻을 짐작해보니, ‘세계의 모든 사건은 순환을 통해 동일한 순서로 영원히 반복된다, 그래서 ‘지금’과 ‘여기’가 앞으로 다가올 그 미래와 동일한 것이고, 그래서 지금 여기의 고통과 싸워 극복하는 자가 영원으로 가는 자’라고 이해하지만, 어디까지나 해석일 뿐 정의는 아니다.
저자부터가 자신의 철학의 핵심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으므로 독자는 누구든 달리 해석할 여지를 충분히 누리면 된다. 그의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집필한 수 십 편의 논문과 책 대부분이 아포리즘에 가깝고, 매우 문학적으로 상징적이고 은유적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설명이나 논증이 아닌 열린 해석으로서 여지의 확장, 이것이 니체가 스스로 행한 반(反)규정의 철학 글쓰기다. 그래서 그 이후의 세계 지성사가 그의 아포리즘에 열광하고, 그 위에서 수많은 학자들과 문인들이 해석과 비판을 겹겹이 해나가면서 니체의 사유가 계속 확장된 것 아닌가. 그리고 그로 인해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이 열리고 인류 지성계에 새로운 활로가 열린 것 아닌가. 그러니 쉽게 규정하고 단정하고 정의 내리는 것은 이 시대에 지성으로서 따라야 할 자세는 아닐 것이다.
니체는 우리가 종교든 학문이든 삶의 방편이든 이념이든 간에 뭐든지 각각 그리고 수시로 맥락에 따라 깊이 들여다보기를 요구한다. 집을 보는 일로 치면, 지상 가옥이라는 표면만 살펴보지 말고, 그 건물의 토대가 되는 지하까지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나 규정 등을 통한 것을 따르면 어떤 특정 관점만을 살펴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군가의 생각에 그냥 따라가는 것이니, 그것은 집의 지상 건물만 보는 것과 같다. 그러니 그 집의 진정한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지하로 내려가서 살펴야 하는데, 그것은 그 정의의 근저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역사적으로 계보를 훑어 올라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니체는 그 뒤에 가려지거나 안 보이는 밑에 감추어진 것들을 파악해야 하는데, 정 알 수 있는 근거가 없으면 추측을 통해서라도 해야 한다고 했다. 철저한 과학의 배제와 성찰의 강조다. 그래서 니체는 그러한 작업을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수수께끼에 빠지는 자에게 열광하라고 했다. 그는 무엇이든 열린 답을 구했고 그 과정도 열려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다름에 대한 인정이고 다양성의 추구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과 같은 숫자의 접근은 평균 유지를 위한 다수의 폭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멀리 해야 한다. 그에 의거한 삶을 살면 생존은 할지 모르지만, 삶은 초라해진다. 남는 것은 법칙이나 체계라는 다수가 다수를 위해 다수에 의해 만들어 놓은 신화일 뿐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흔히 원인과 결과라고 믿는 과학적 논리는 신화적 허구이고, 숫자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 숭배를 합리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근대성이고, 그에 기초한 민주제와 자유주의의 본질이다. 나는 인류가 이들보다 더 좋은 체제를 찾아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최적의 체계일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것을 따르고 그 안에서 문제를 찾아 보완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 고민의 말단의 실마리를 니체를 통해 씨름하는 중이다.
"(원인과 결과) 그 자체에는 ‘인과의 연함’도 ‘필연성’도 ‘심리적 부자유’도 없다. 그것에는 ‘결과는 원인에 뒤따른다.’는 것이 없으며, 이는 어떤 ‘법칙’이 지배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원인, 계기, 상호성, 상관성, 강제, 수, 법칙, 자유, 근거, 목적을 꾸며냈던 것은 우리이다. 우리가 이러한 기호 체계를 ‘그 자체로’로 사물에 투사하고 혼합시킨다면, 우리가 항시 그렇게 해왔듯이, 다시 한 번 그것을, 다시 말해 신화적으로 만드는 것이 된다. 그것은 ‘부자유 의미’라는 신화이다."
《선악의 저편》 21.
경계를 짓는 것은
가두는 것이다.
벗어나고 싶으면, 허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