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광수 Jan 06.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25.

24. 공동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미처 몰랐다. 웬만한 전쟁보다 훨씬 많이 사람을 죽였으니, 그 때문에 가히 내가 겪은 것들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인류의 재난을 겪는다. 재난을 겪어 가면서 또 하나의 문화를 어렴풋하게 짐작하게 되었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유교와 불교가 혼합되어 만든 세계관에 사는 사람들이 그 재난에 대처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심한 일반화를 하자면, 전자는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흐름에 있고 후자는 공동체의 안녕을 중시하는 입장에 있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전자는, 그것이 옳든 그르든,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강제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죽더라도 개인의 자유가 최우선이다. 반면 후자는 공동체가 그 복리와 안녕을 증진시키는 목적이라면 개인의 자유는 희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고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보는 사람에 달라지는 것이고 그 사람 스스로가 특정한 문화 속에서 자라난 사람일 것이기에 객관적인 판단이란 어렵다고 본다. 그러니 그 둘에 대한 가치 판단은 별 의미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여 이 자리에서 논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니체가 가진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관계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와 관계한 사고 체계다. 그런데 그 스스로 그 공동체에 속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에 대해 타자로서 관계한다. 전형적인 타자로서의 철학이 된다. 서구 세계는 개체를 찬양하고, 그 개체성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독립된 자유임을 부르짖지만, 사실은 그와 반대다. 그 개체가 오래된 전통에 얽매어 있어 실질적으로는 개체는 없고, 공동체만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는 근대 유럽이 만들어낸 자유니 민주니 하는 개념을 철저히 반(反) 개체성의 시스템이라고 비판한다. 


니체의 사고를 따르면, 기독교와 근대라는 전통과 이념을 따르는 자들은 종교심이라는 본성을 지배 틀로 변형시켜 다른 개체들을 종속시키며 살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겉보기와는 달리 진정한 공동체주의자가 된다. 그들이 구성하는 공동체를 관통하는 보편성이라는 것은 배타적으로 전통과 도덕에 반하는 독립적 개체를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질서를 따르도록 시키는 것이니 겉으로는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지만 사실은 철저히 공동체적 규율을 강요하는 것이 된다.


공동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혈연 공동체인 가족에서부터 지역 공동체 혹은 민족 공동체까지 여러 종류가 잇고 그 성격들도 각기 다르며 딱히 몇 가지로 나누어 구별할 수 없다. 그것은 각각의 공동체들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여러 공동체 가운데 니체가 가장 많이 비판을 한 것은 국가다. 그것은 국가란 기본적으로 질서를 지키기 위해 개인을 억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유지시키기 위해 반드시 어떤 법이나 체계를 필요로 하고 도덕을 부지불식간에 만들어 작동시키기 때문에 니체는 그것을 비판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내세우는 가치는 니체의 최고 가치인 개체의 실존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래서 국가를 배신하는 것이나 국가를 거짓으로 속이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 없다고 본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현대 정치가 전가의 보도처럼 신봉하는 민주제에 대해서도 비판을 날을 거두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제라는 것은 개체의 특이성을 말살시키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특이성들의 평등 체제가 아니라 특이성 없는 것들의 평등 체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니체의 민주제 부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여러 정치 체제 가운데 민주제를 부정한 것으로 강조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가 민주주의가 아닌 전체주의나 사회주의를 지지했다면 민주제를 혐오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있지만, 그는 그것이 민주제든 아니든, 그 어떤 것이든 공동체를 혐오하였다. 이는 결국 니체의 민주제 부정은 오로지 창조적인 개인에게만 가치를 부여할 뿐 그 외의 모든 체제는 부정한다, 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바람직할 것이다. 니체에 있어서 민주제의 비판은 독재제의 찬양이 아니고 공동체가 아닌 개체의 찬양인 것이다. 니체의 글이 주로 아포리즘이고 논리를 싫어하고 감성을 가치 있게 생각하기 때문에 설명이나 논증을 건너뛰다 보니 그의 민주제 비판을 마치 반(反)민주제 주창자로 오해하곤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최대한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니체는 민주주의를 반대했다는데 동의한다 치더라도 그를 독재나 전제 정치를 하는 체제를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을 말해 보자. 사회에서 여러 집단들이 민주와 평등에 가까이 가면 서로 다른 다양한 집단이나 계층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최근 검찰 개혁을 둘러싸고 그 이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쪽이 얼마나 극렬하게 갈등을 유발시키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검찰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언론으로서의 가치와 명예를 헌신짝 버리듯 버린 거의 모든 언론이 일으키는 집단 갈등이나 검찰의 반동을 노골적으로 지켜주는 법원의 행태를 봐도 그 갈등이 얼마나 민주제 안에서 극에 달하게 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 뿐인가? 자본의 횡포는 어떤가? 주요 재해로 인해 노동자 그 가운데서도 사회적 위치가 아주 취약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연달아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지는데도 그들은 오로지 이익을 위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법 제정을 노골적으로 반대한다. 사람 목숨을 그야 말로 파리 목숨 취급하는 게 아닌가? 이런 것이 과연 민주제가 아직 제대로 꽃 피지 않아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그래서 민주제를 더욱 꽃 피워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제도의 문제보다는 개인 개체의 유약함에 기인하다고 하는 니체의 판단이 더 근원적이라고 본다. 개인이 그 제도 안에서 강한 저항성을 잃고 유약하게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어서 특히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가 세운 법과 질서 도덕에 묶여 제대로 저항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본다. 궁극적으로 개인의 저항의 힘이 키워지지 않는 한 공동체의 성격이 어떻더라도, 그 안에서 인간은 인간 존엄을 확보할 수는 없다.


그러니, 반드시 모든 이가 똑같이 대접 받아야 한다, 똑같이 사회적 지위를 누려야 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피해자니 이건 사회 구조의 문제다, 라고 말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여성이 하는 역할과 남성이 하는 역할이 왜 기계적으로 동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선생과 학생, 부자와 빈자, 정치 지도자와 일반 국민 모두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는 것을 강제로 죽이고 동일하게 평등함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인간 개인에게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주는 길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진다. 문제는 휴머니즘이지 이상주의에 기반 한 이념이나 어떤 체제는 아니다.


"착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다 독을 마시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착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다 자신을 상실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이 자살을 하며, 바로 그것을 삶이라고 부르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혼자만 잘 살믄 뭔 재미여,


라고 말하지 않던가?


진짜로 그러하던가?

작가의 이전글 니체의 눈으로 보라. 2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