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광수 Jan 06.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24.

23. 긍정

나이가 60이 넘으니 비로소 그 ‘승질 머리’라는 게 조금이나마 잡힌 듯하다. 한 편으로는 조금 여유가 생겨 좋기도 하지만 또 다른 편으로는 분노가 사라진 것 같아 서운하기도 하다. 그렇게 변한 데에는 생리적 현상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건 원인이라기보다는 여러 현상 중의 하나일 테고, 결국 ‘운명’이라는 것에 대한 관점이 변해서 일 것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누군가 젊을 때와 나이가 어느 정도 들었을 때와 가장 달라진 점을 하나만 꼽으라고 물으면, 난 주저하지 않고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고 답한다. 삶을 살아오면서 나의 지난 세월이 어느 정도까지 운명적인 것이었는지, 어느 정도까지 그 운명과 관계없이 나의 노력으로 개척하고 뜻을 세워 이루었는지에 대해선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니체가 말하는 바대로,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 사랑’만큼이나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운명을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인가, 적어도 그 이전 젊었을 때와 비교했을 때 나라고 하는 한 인간이 의지와 노력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그리고 운명에 대한 긍정적인 발걸음을 딛기 시작했다.      


인간이 어떤 본성과 특질을 가지고 태어나고, 자라나면서 그 생물학적 실체가 사회 속에서 어떤 작용과 반작용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 자신의 책임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을 나이가 들면서 더욱 많이 하는 듯하다. 어쩌면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처한 특정환 상황과 환경마저도 전적으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점차 커지는 듯하다. 그러면서 그의 운명은 이미 존재했었고 또 앞으로도 존재해야 할 어떤 운명에서 분리될 수 없다, 는 정도로 사고의 방향이 흐르는 것 같다. 인간의 삶은 특정 의지나 특정 목적의 결과만은 아니고,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속에서 그 의지를 키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완연히 사로잡혀 있다.      


운명이란 취사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통째로 긍정을 하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예외로 둬 배제하거나 골라내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현상을 특정한 측면만으로, 인위적으로 규정하거나 정의 내리기를 부정하는 니체 특유의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특정한 뜻이나 목적에 따라 행위를 국한시키고, 이성이나 과학을 기준으로 삼아 그 기준에 못 미치는 것을 배제하거나 평가절하 하는 것을 부인하는 태도다. ‘자연’이 의미하는 바,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원하는 것이다. 니체가 스승으로 삼은 스피노자가 생각한대로 신은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창조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사고와 같은 선상에 있다. 그 자연은 신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존재라서 그렇다. 우리는 그 자연을 가능한 한 이해하려고 시도할 뿐이다. 그 자연과 같은 것이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회귀하고 또 회귀하여 반복하고, 그 속에서 현재의 자신의 삶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회피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우리가 흔히 쓰는 그 시쳇말을 ‘즐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로 더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운명을 긍정하여 사랑하는 것이 되는가? 니체는 중력의 힘을 거스르며 춤을 추듯이 가볍게 비상하라고 한다. 여기에서 중력을 극복한다는 것은 자신을 억누르는 모든 종류의 짐 즉 종교, 신화, 도덕, 관습, 시스템 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고, 이성, 과학, 근대성 등을 기준으로 타자를 규정하고 평가하는 따위의 짓을 행하지 말라는 뜻이다. 춤을 추려면 몸이 가벼워져야 하듯, 삶 또한 가벼워져야 된다는 뜻이다. 몸이 가벼워지려면 무엇보다 춤을 추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 춤을 추듯 하라는 것은 삶을 예술로 만들라는 의미로도 이어진다. 여기에서 니체의 예술은 디오니소스로 연결됨을 상기해보자.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다. 도취와 망각의 신이다. 아폴론이 비전을 만들어 그 안에 묶여 있음에 반해 디오니소스는 도취하고 망각하는 신이다. 아폴론이 니체의 비유대로 말하자면 낙타이고 디오니소스는 어린 아이인 셈이다. 그러니 어린 아이처럼 얽매이지 말고, 무슨 좋지 않은 일을 당했더라도 금방 잊어버리고 새로운 놀이를 찾아 자유롭게 살면서 오로지 자기 주체를 힘의 원천으로 삼아 살라는 의미다. 도덕이고, 희생이고, 체면이고, 질서고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살라는 의미다. 그러니 결국 니체의 ‘아모르 파티’는 삶을 축제처럼 즐기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믿고 그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되어 운명을 긍정, 초긍정 하면서 즐기라는 언명이다.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특히 과거에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을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운명적으로 부닥쳐 그 어려운 난관을 헤쳐 온 사람이라면 대답하시라. 그 숱한 고통의 시간을 거치면서 자신도 희생하고, 가족도 희생하고, 다 떠나고 주변에 남은 것은 허무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묻는 것이다. 당신은 왜 허무한가? 삶에 대한 의욕이 사라져버려서 그럴 텐데, 그것은 결국 여전히 고통 속에 존재하는 당신의 현존재에 대해 당신이 신뢰하는 것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해석의 문제인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이 허무하게 다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다 떠나고 나만 홀로 남은 그 우둔함이 빚어 낸 허무함을 긍정해야 한다. 그것마저 통째로 받아들여 삶을 운명적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크게 전환해야 한다. 그러면 극복할 수 있다. 반면에 세상을 등지고, 포기하고 밖으로 나가버리면 또 다른 목적, 규정, 시스템이 만든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안에서 희생, 자비, 도덕, 대의 등의 ‘이타’라는 위선을 떨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또 다른 허무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 삶을 가볍게 하고 자유롭게 사는 게 옳다. 과거를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계산하고, 미래를 계획 세우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마냥 다 잊고 술과 함께 놀고 즐기는 축제에 온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좋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인가, 라고 묻지 않는 게 좋다. 그 해석조차도 당신의 몫이고, 당신만의 것이니까.      


"환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은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결국 하나의 큰 긍정으로 이끌어가게 한다. 가치 전환과 새로운 방향 설정은 먼저 긍정할 때, 즉 새로운 가치와 지평들을 그 출발점으로 제시할 때 비로소 설득력 있는 시도가 된다. “현실”을 “무거움의 정신”으로부터 “해방”하는 것, 환영적인 도덕으로 인한, 그래서 삶에 적대적이 된 도덕으로 인한 삶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현실 속으로 깊이 파고 들ㄹ어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도덕의 계보》 24.

칠흑 같이 어두운 밤, 빛이

긍정은 아니다.

그 밤, 자체가 긍정이다.

작가의 이전글 니체의 눈으로 보라. 2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