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얼굴 앞에서(2021)를 보고
낯설다. 당신얼굴 앞에서(2021)는 홍상수 감독이 데뷔 이래 꾸준히 쌓아 올렸던 이른바 홍상수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시의성이다. 꽤 오랜 기간 동안 홍상수의 영화는 어느 특정 시간대에 닻을 내리지 않으려 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며칠 안에 생긴 일을 다루었고 그 안에서 서로를 참고하고 경합하며 무한한 세계의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10년 전 북촌방향(2011)에서 성준(유준상 분)은 북촌을 영원히 맴도는 망령이었다. 시간이라는 축에서 자유로워진 그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반복될 어떤 역사의 표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 초장부터 무려 부동산 이슈를 여러 번 언급하며 시점을 2021년으로 고정시킨다. (반복되지 않을 역사이길 바란다.) 게다가 식당에 오는 손님보다 배달이 많다며 에둘러 시국을 말하기도 하고, 우연히 카메라 중앙에 들어왔을 로켓배송 트럭에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놀랄 노자다.
죽음이라는 주제가 다시 한번 중심에 섰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역시 2018년 이전까지 그의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형식적인 것을 거부하고 날 것 그대로를 보기 원하는 홍상수의 영화에 죽음은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트라우마이며 등장하는 순간 이야기의 해석의 중심에 들어와 영화 바깥에서 발생한 통념을 주입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고 예술가는 죽음을 다뤄야 한다. 홍상수의 해답은 죽음을 앞둔 자의 얼굴인 것 같다. 상옥(이혜영 분)의 얼굴을 하고 등장한 죽음은 초연하고 뜬금없이 고백을 한다. 나 곧 죽는다고. 그리고 영리하게 쉼표를 둔다. 관객이 "아, 주인공이 그래서 기도를 하고 가족을 보러 왔고 옛 집을 찾아갔구나"라고 단정하려는 순간 감독(권해효 분)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비를 맞고 돌아와 환기된 정신으로 다시 만담을 이어나간다. 그러면서 다시금 상옥의 얼굴을 보게 된다. 서툴게 기타를 치고 죽음을 극복했던 어떤 경험을 이야기하는 그는 여전히 살아있고, 중요한 것은 예정된 죽음이 아니라 끝이 정해져 있음에도 한 순간도 예측할 수 없는 삶이다.
앞서 말한 북촌방향(2011)과 이 영화를 비교해서 보면 그동안 홍상수의 세계에서 변하지 않은 것과 변화한 것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반복을 통해 쌓아 가는 홍상수 특유의 구조는 여전히 견고하고 감각적이다. 이를테면 첫 장면의 상옥과 마지막 장면의 상옥은 구분이 가지 않고, 그가 비슷한 일을 이전에도 겪었고 앞으로도 여전히 겪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은 순간에도 욕망은 들끓고, 가족에게도 말 못 한 비밀을 털어놓기도 하지만 종종 믿음은 그를 배신할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인물과 반복되는 역사를 바라보는 홍상수의 시선이다. 10년 전 언덕을 멍한 표정으로 내려오는 성준을 보며 느낀 것이 냉소와 관조라면, 소파에 누워 섬뜩하게 웃는 상옥을 보면서는 오히려 연민과 안타까움이 일어났다. 물론 다른 차이도 있지만, 2021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 같은, 유달리 더 "사람"같은, 상옥을 차마 냉대할 수가 없다. 삶의 처연한 구석이 이렇게 깊다.
극장을 나서며 나는 이 영화가 홍상수가 그리는 가을이 아닐까 생각했다. 붉은 옷을 입고 혼신을 다해 기도하는 늘씬한 상옥이 떨어지고 있는 단풍잎처럼 보였다. 자신을 바닥으로 잡아당기는 운명을 거부할 수 없지만 공기와 마찰하며 저항하는 것을 멈추지도 않는다. 좌우로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나 여기 있다고 외친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면이 유독 슬프게 느껴졌다. 잠귀가 유독 어두운 동생 옆에 소리도 없이 내려앉아 무슨 꿈을 꾸는지 묻는 상옥이 떨어진 낙엽같이 느껴졌다. 이제는 노장이라는 말이 썩 어울리는 홍상수 감독. 그가 올해 가을에 그린 처연함은 참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