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필요(2024)를 보고
어느 날 나타나 한국인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돈을 버는 이리스(이자벨 위페르 분). 그의 교수법은 특이하다. 집요하게 질문하여 마음을 들춰내 프랑스어로 된 문장으로 재구성하여 전달한다. 어쩌면 왕성한 창작가다. 영화의 초반부, 그의 위치는 전지전능에 가깝게 그려진다. 그의 가르침을 받는 젊은 여자(김승윤 분)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리스는 능수능란하게 젊은 여자의 삶의 단편을 도려내어 아버지와의 미묘한 관계를 포착하고 프랑스어로 읽히고 들릴 시를 한 편 창작해 낸다. 무엇보다, 그는 돈을 받는다.
전지전능할 것만 같던 그의 위상은 두 번째 여자(이혜영 분)를 만나며 흔들린다. 첫 만남부터 그의 이름을 틀리게 부르는 굴욕을 안기더니 그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알고 보니 그의 교수법은 학술적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해본 방법이었으며 심지어 최근에서야 시도를 해봤다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돈을 벌어도 되는 것인지 추궁받는 궁지에 몰린 순간 그는 교수법을 시연하고 다행히도 효과를 본다. 연주와 내면에 관한 토씨 하나 바뀌지 않는 문답이 이어지고 또다시 아버지와의 미묘한 관계를 발견한 이리스는 또 다른 시를 창작해 낸다. 무엇보다, 그는 돈을 받는다.
두 번의 만남 속에서 가까스로 체면을 지켜낸 이리스. 하지만 세 번째 여자(조윤희 분)를 만나며 그의 위상은 아래로 아래로 추락한다. 그는 이리스가 같이 살고 있는 남자(하성국 분)의 어머니이며 이리스가 끼어들어 시를 짓고 돈을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리스가 불가지(不可知)한 삶에 그저 맨발을 깊이 딛는 것으로 대응하는 사람이라면, 남자의 어머니는 관념에 불과할 앎이라도 추려내어 삶을 이끌어가려는 사람이다. 그는 삶을 조직화할 수 있는, 적어도 그렇게 하려는 사람이며 지출 내역에 기반해 작성한 예산 목록에 이리스의 시가 적힐 리 만무하다. 이리스는 교수법을 보여줄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결국 침범하지 못한다.
두 여인의 사랑을 받는 남자. 현실에 초연한 듯한 이리스에게는 돈을 받고 현실에 사는 어머니에게서는 조언을 받는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내어주는 자비로운 사랑이다. 어머니의 된장찌개를 먹은 남자는 이리스를 찾아 마술적인 여정을 떠난다. 어디인 지 몰라도 결국 찾을 수 있다. 재회의 순간. 카메라에 비친 이리스는 오래된 돌산 같고 남자는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등산객 같다.
오르고 내리는 이리스의 위상은 관객의 삶에서 영화가 가지는 위상과 같다. 영화가 삶의 전부일 것 같은 기이한 열병은 시간과 함께 무뎌지고 어느 순간 외면하기도 하지만 문득 발아래를 내려다보면 이미 그것은 돌산이 되어 일상적 시선의 높이를 형성한다. 그래서 결국 돌아온다. 영화는 이리스의 입을 빌려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냐고 물어본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