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던 리치: 소멸의 땅(2018)을 보고
이번 5월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열풍 속에 극장은 붐비지만 동시에 빈곤했다. 개봉일로부터 3주가 조금 지났을 무렵에도 엔드게임의 예매율은 40%를 웃돌았으며 (2019. 5. 15. 기준), 그에 걸맞은 수의 상영관을 가져가고 있으니 많은 영화들이 경쟁을 피하기 위해 개봉일을 의도적으로 늦추고 있다. 개인적으로 소위 '상영관 독과점'이라는 것이 20세기의 극장이 21세기에도 살아남아 만드는 구조적 모순이라고 생각하기에 그 누구도 비난할 생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에 볼 만한 영화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다행히 나는 넷플릭스를 구독하고 있으며 의지만 있다면 볼 만할 영화를 꾸준히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의지만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인 것은, 선택의 홍수 앞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찾기가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스트리밍 서비스 중 가장 넓은 콘텐츠 풀을 자랑하는 넷플릭스는 2018년에만 1,500 시간 분량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생산했는데, 부작용으로 콘텐츠의 수가 많아질수록 고객의 선택이 어려워지는 부정적인 네트워크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 실제로 지인들과 대화할 때도 넷플릭스가 화두에 등장하면 어김없이 무엇을 봐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하였다.
그리하여 '넷플릭스 같이 보기'를 한번 연재해보기로 하였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중 개인적으로 좋다고 생각했던 영화나 드라마를 추려서 정리하여 공유할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넷플릭스 영화 서던 리치: 소멸의 땅(2018)을 다뤄보고자 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에 출연한 나탈리 포트만과 테사 톰슨, 베네딕트 웡이 나오는 만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친숙하게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선정하였다.
서던 리치: 소멸의 땅(2018)은 전작 엑스 마키나(2014)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만남이 그리는 서스펜스를 성공적으로 표현한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작품이다. 두 작품에서 감독은 미지의 존재를 상상하고 그와 인간의 만남을 묘사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비롯하여 다른 많은 영화들은 인공지능이나 외계의 존재를 묘사할 때 상당 부분을 의인화하곤 한다. 비록 독특한 외모와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인간의 가치관을 공유하고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이러한 동질성은 내러티브의 이해를 돕고 명쾌하게 만든다는 순기능을 띠지만, 미지의 존재를 탈 쓴 인간으로 상정하는 논리의 비약 또는 생략을 거치게 된다.
반면에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미지의 존재가 가지는 본원적인 이질성에 주목하여 의인화의 장막을 걷어낸다. 엑스 마키나(2014)에 등장하는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들고 인간의 모습을 부여받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종(種)에 속한 존재로서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분명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이에 더 나아가 서던 리치: 소멸의 땅(2018)에 등장하는 쉬머 the Shimmer는 하늘에서 불현듯 떨어진 존재로 추상적이고 파괴적인 공간이다. 인류는 두려워하며 쉬머가 지구로 온 이유를 찾지만, 그것은 그저 어떤 특수한 목적 없이 존재할 뿐이며 그 이질성만으로도 인류에게 위협이 된다. 즉,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가치관의 차이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의 차이가 갈등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감독이 두 작품에서 이뤄낸 탁월한 시각적 성과는 보는 이로 하여금 미지의 존재의 이질성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한다. 엑스 마키나(2014)에서는 인공지능은 완벽한 인간의 모습과 부품으로 가득 찬 로봇의 모습을 오가며 관객들을 불편한 골짜기로 초대했으며, 서던 리치: 소멸의 땅(2018)에서 빛나는 비눗방울 장막처럼 생긴 쉬머의 외관은 탐사대와 관객에게 저 안이 지구와는 확연한 다른 공간임을 분명히 경고하는 듯하다. 게다가 쉬머 내부의 동식물들은 기묘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을 유려한 시각효과로 표현하여 본능적인 거부감을 자아내게 만든다.
탐사대장이자 심리학자인 벤트리스 박사(제니퍼 제이슨 리 분)의 말처럼 쉬머는 암세포를 생각나게 한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암세포의 이미지를 제시하며 쉬머와의 유사성을 환기시킨다. 세포주기가 조절되지 않아 무한히 증식하는 악성 종양처럼 쉬머는 외적으로는 거침없이 자기 자신을 확장하며, 내적으로는 맞닥드리는 모든 것을 흡수하고 동화한다. 또한 동화된 개체의 특성은 사라지지 않고 쉬머 내부에 남아있으므로 쉬머는 개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속성을 부여한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이전의 모습은 잃어버릴지라도 필멸자의 운명을 벗어나 불멸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쉬머로 파견된 탐사대는 자기 파괴의 성향을 강하게 지닌 자들이다. 자살 임무에 가까운 탐사대에 지원한 자들은 더 이상 쉬머 밖의 삶에 미련이 없는 사람들로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반복해온 인물들이다. 커리어든 건강이든 결혼 생활이든, 삶의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비합리적으로 버리는 이들은 인간의 필멸적 속성을 보여준다. 반복된 자해 끝에 탐사대에 자원한 이들은 돌아갈 곳도 돌아갈 생각도 없으며, 마치 암세포가 정상세포를 잠식하듯 쉬머는 이들을 기꺼이 잡아먹어 동화한다.
* 아래에는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은 다음 파트로 넘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리나(나탈리 포트만 분)만이 쉬머에서 돌아온 것은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그는 탐사대 중 유일하게 쉬머 밖으로 돌아갈 이유가 있는 인물이며 자기 파괴에 대한 죄책감이 동기로 작용하는 인물이다. 다른 탐사대원처럼 리나 역시 결혼 생활을 위협하는 자기 파괴 행위를 자행하였으나,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남편은 탐사대에 지원하고 다치게 된 것에 후회하며 탐사대에 지원했다. 또한 그는 생물학자로서 노화를 유전적 결함이라 생각하며 지금의 모습이 유지되는 불멸의 삶을 동경한다. 여러모로 자기 파괴를 일삼는 탐사대와 리나는 이질적이며 쉬머와 더 유사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렇기에 쉬머는 개체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리나의 모습 그대로 영속성을 부여한다. ∞ 문신과 눈동자, 그리고 컵의 물이 맺힌 모습 등은 돌아온 그가 쉬머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그는 리나다. 돌아온 리나는 복제된 케인(오스카 아이작 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자기 파괴로 대변되는 필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는 필멸의 존재가 자기 파괴 성향과 근본적 결함을 딛고 불멸의 존재로 거듭나는 우화라고 볼 수 있다.
서던 리치: 소멸의 땅(2018)은 유려한 SF 장르 영화다. 실제로 많은 과학자들이 무한히 분열하는 암세포의 속성에 주목하여 이를 노화를 치료할 열쇠로 주목하고 있으며,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이러한 최근 과학적 성과에 풍부한 상상력을 더해 어둡고도 긴장감이 넘치는 수작을 만들어냈다. 비록 다루는 내용이 어렵고 제시하는 떡밥을 회수하는데 공을 크게 들이지 않기 때문에 호불호는 갈릴 수 있지만, 묵직하게 전진하는 SF 영화를 즐기고 싶다면 이 영화를 당당히 추천하고 싶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 (2018). 서던 리치: 소멸의 땅 [영화]. DNA 필름스, 스카이댄스 미디어, 스콧 루딘 프로덕츠.
알렉스 가랜드 (감독). (2014). 엑스 마키나 [영화]. 필름 4, DNA 필름스. 유튜브 구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