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은 아리랑의 공감

낯선 땅에서 이어진 고향의 선율

by 강펜치

<아리랑 환상곡>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외국에서 접한 아리랑 관련 일화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개인적이면서도 어딘가 ‘글로벌한’ 나만의 아리랑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그것도 G2 국가인 미국과 중국에서 벌어진 경험이다. 나라와 상황은 달랐지만, 모두 유명한 호수를 배경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들이 태어난 해였던 2015년이었기에 기억이 뚜렷하다. 그해 가을이었다. 한 언론단체가 진행한 중국 단기 연수에 선발돼 일주일 넘게 베이징과 항저우, 상하이에 머물렀다. 베이징에서는 베이징대학을 매일 오가며 강의를 들었다.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선전 문구와 자본주의의 꽃인 광고가 시내 곳곳에서 공존하는 모습이 꽤 흥미로웠다.


베이징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도착한 항저우는 매우 아름다웠다. 뽀얀 먼지로 답답했던 베이징과 달리, 항저우의 하늘은 쾌청했다. 온화한 날씨 속에서 서호 주변에 남아 있는 옛 자취를 따라 걸었다. 우리 일행은 어느새 중국의 고운 자태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날 만찬은 서호 인근의 유명한 식당에서 열렸다. 1972년 2월, 미·중 수교 논의가 이뤄질 때 닉슨 미국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이 항저우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식당에 키신저 장관이 실제로 다녀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부 한쪽 벽에는 키신저 전 장관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찬 자리에는 중국 공산당 관계자들도 함께했다. 식탁에서 대화가 한창 무르익어가던 즈음, 한 공산당원이가 뜬금없는 제안을 꺼냈다. 본인이 아리랑을 무척 좋아하는데, 한국 기자들이 즉석에서 한 곡 불러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럼에도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던가. 호스트의 정중한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결국 모두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쭈뼛거리다 이내 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불렀다. 내 평생 가장 어색하게 불러본 아리랑이었다. 서호는 지금도 그날 밤, 수면 위로 흘러가던 우리의 아리랑 가락을 기억하고 있을까.

우리의 마지막 방문지는 공교롭게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항저우에서의 어설픈 아리랑 합창이 워낙 강렬했나 보다. 임시정부 청사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리랑 가락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빛바랜 사진 속,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리랑 선율만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서 흘렀다.




미국 콩코드의 월든 호수(왼쪽)와 호수 주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동상. 동상 뒤편 오두막은 복원된 것이다.


미국에서 겪은 아리랑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이다. 미국 연수 중이었던 2024년 3월 한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보스턴을 찾았다. 첫날은 보스턴 근교의 콩코드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곳에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은둔하면서 쓴 책 <월든>의 배경이 되는 월든 호수가 있었다. 나는 그가 월든 호수로 들어갔던 이유를 늘 동경했다.


나는 깊게 살고 싶었다. 삶의 정수를 한껏 빨아먹고 싶었다. 아주 억세게 스파르타식으로 살면서, 삶이 아닌 모든 것을 궤멸시키고 싶었다. -<월던>


나도 월든에 방문해 거추장스러운 삶의 잔가지를 정리하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보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이 계획을 산산조각 냈다. 바로 추위였다.


3월 미국의 동부는 나에게 한겨울 날씨와 다를 바 없었다. 따뜻한 애리조나에서 살았던 나와 아내, 아들은 오들오들 떨어야만 했다. 삶의 정수를 빨기는커녕 내 정신이 추위에 빨릴 판이었다. 우리는 호수를 종종걸음으로 한 바퀴 돌고 잽싸게 차에 올라탔다.

우리가 이동한 장소는 월든에서 차량으로 3분 떨어진 '미니트맨 역사국립공원'이었다. 이곳은 미국 독립전쟁의 출발점이 된 1775년 렉싱턴–콩코드 전투에서 민병대 ‘미니트맨’의 업적을 기린 공원이었다. 이대로 콩코드를 떠나기 아쉬워서 이곳만 둘러보고 보스턴으로 이동하려던 참이었다.

차에서 내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식민지 주민이 영국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는 다리만 잠깐 건넜다가 다시 차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군밤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낀 한 남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형광색 조끼를 입어 공원 관리인인가 싶었다. 자세히 보니 어느 정도 연세가 있으신 분이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한국에서 왔어요. 여기는 저의 아내와 아들입니다."


"아 그러세요? 저는 한국어를 모르지만, 아리랑을 한국어로 부를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는 즉석에서 정확한 한국어로 완벽한 아리랑 가락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강추위 속에 칼바람이 우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에서 허연 입김을 뿜어내며 아리랑을 완창했다. 곁에 있던 아내는 무척 반기며 그의 아리랑 열창을 스마트폰으로 녹화했다.


그곳은 미국 국가인 ‘Star-Spangled Banner’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그런 공간에서, 그것도 미국인이 직접 부르는 아리랑을 듣게 될 줄이야. 한때 격렬했던 전장에서 듣는 아리랑은 색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존 뮤레시아누였다. 하버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며칠 전 존에 대한 기사를 하나 발견하고 무척 반가웠다. 기사가 전하는 존에 대한 이야기는 놀라웠다.

그는 그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46개 언어로 노래를 불러준다. 각 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노래와 기도문, 시로 전 세계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리랑도 그중 하나였던 셈이다. 존은 심부전 진단을 받은 이후 더 많이 걷기 위해 공원을 찾으면서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존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도록 DNA에 프로그램돼 있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그랬다. 존이 불러준 아리랑은 우리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귀가 떨어질 듯한 한파 속에서도 우리는 기쁨을 맛봤다. 잠시나마 봄날 같은 고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덤이었다. 무엇보다 존 또한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우리에게 아리랑을 불러주는 존 뮤레시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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