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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 May 11. 2017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 3가지

이주희 저 <강자의 조건> 서평

“…재미있는 점은 이런 영국 해군의 혁신이 오히려 결핍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자원이 부족하고재정도 풍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스페인은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혁신의 기회를놓칠 수 밖에 없었다.”

(책 "강자의 조건(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360516)", 이주희 저)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영국에 의해 처참히 패배했다. “처참하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영국 함대가 침몰시킨 스페인 함선의 개수 때문이 아니다(사실 영국이 교적으로 침몰시킨 배는 3척에 불과하다). 스페인은 영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해상강국으로서의 명예가 크게 실추되었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내주고 말았기 때문이다.


영국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확실한 것은 당시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고, 영국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16세기 스페인은 포르투갈 통치도 겸하면서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보유하고 있던 해외 식민지(아메리카 대륙과 인도, 필리핀 등)까지 포함하여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었다. 육군과 해군력도 강력하여 육군 강국인 프랑스를 제압하고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크 군의 최후 공세를 몰아냈다(이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지중해를 넘보지 않았다). 그에 비해 영국은 유럽 대륙 북서쪽에 있는 작은 섬나라 국가에 불과했을 뿐이다. 자원과 재정도 넉넉하지 못했고, 오늘날 칭송받는 대영제국의 막강한 해군도 당시에는 별 볼 일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스페인을 무찌를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일까? 이주희의 <강자의조선>에 따르면 연유는 다음과 같다.


1.    영국 왕정이 공인한 해적 ‘프란시스 드레이크’


“16세기 스페인은 신대륙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황금과 은을 약탈해 오고 있었다… 당연히 이 보물을 노리고 해적들이 활개를 쳤다. 특히 유명한 것은 프란시스 드레이크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에게 해적들 특히 드레이크의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여왕의 대답은 엉뚱한 것이었다. 드레이크에게 오히려 기사 작위를내린 것이었다.”


(책 "강자의 조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360516)", 이주희 저)


해적의 세계를 다루는 일본의 유명 만화 ‘원피스’를 보면 ‘칠무해’라는 집단이 등장한다. 각본에 따르면 ‘칠무해’는 세계 정부의 공인을 받은 7명의 해적들로서, 세계 정부의 앞잡이 역할을 해주는 대신에 해적질을 인정받은 자들을 일컫는다.이런 경우가 실제 역사 속에서도 여러 차례 있었는데(가령 코에이가 만든 유명 게임 ‘대항해시대 II’에서 등장하는 하이레딘도 실제 역사 상 존재했던 해적으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해군사령관으로 임명된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공인 해적은 영국의 프란시스 드레이크가 아닐까 싶다. 드레이크는 유명한 항해사이자 해적으로, 스페인 함선을 주로 노략하여 스페인 선원들 사이에서는 ‘엘 드라코(용)’로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드레이크와 같은 해적들을 적극 지원하여 스페인에 대한 사략(私掠)을 장려했고, 전쟁 시에는 이들을 정식 해군으로 기용하여 출전시켰다. 1587년, 드레이크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허락을 받고 카디즈 항에 정박 중이던 스페인 함대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이때 수십척의 상선을 불태우고 엄청난 전쟁물자를 약탈한 것 뿐만 아니라, 음식을 저장하는 모든 통을 불태웠는데, 이 계략이 이후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충분히 건조된 통이 없었기 때문에 습기가 남아있는 통에 음식을 보관하게 되었고 무적함대의 승무원들은 식중독과 전염병에 취약해진 것이다.”


2.    해적이 만든 천하무적의 배, 레이스 빌트 갈레온


“레이스 빌트 갈레온선은 당시 최고의 영국 전함이었습니다… 속도와 방향전환을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면과 가깝고 무거운 무기를 실을 수 있습니다. 빠른 기동력을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책 “강자의 조건(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360516)",이주희 저)


16세기 영국의 악명높은 해적은 프란시스 드레이크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사촌형인 존 호킨스도 있었다. 그 둘은 젊은 시절 스페인의 감시망을 피해 신대륙에서 황금을 빼돌리는 불법사업을 벌이다 스페인 함대의 공격을 받고 겨우 살아남는다. 그때부터 그 둘은 각자의 길을 따라 스페인에 대한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드레이크는 훌륭한 전술가로, 호킨스는 기발한 전함 설계자로서.


존 호킨스는 오랫동안 바다를 누비며 사략질을 해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배를 개발하는데 착수한다(당시에는 처음으로 기하학에 입각한 설계도를 그려서 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의 전함(갈레온선)들이 갖고 있던 가장 큰 단점이었던 불안정한 기동성과 느린 속도를 배의 선수와 선미의 크기와 높이를 줄이고 배를 전체적으로 길고 날렵하게 만들어 크게 개선하였다. 또한 포열 갑판을 늘려 장착할 수 있는 함포 수를 늘리고 화력을 극대화하였다. 레이스 빌트 갈레온선으로 불리게 된 이 당대 최고의 전함은 결과적으로 “기존의 범선보다더 빠르고, 더 급격한 움직임이 가능하며, 화력도 강력했다.”


당시 스페인의 거대 함선들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고 대량의 짐을 싣을 수 있도록 설계된 탓에 레이스 빌트 갈레온선에 비해 속도도 느리고 기동성도 제한되었다. 반대로 레이스 빌트 갈레온선은 전투용으로 특화된 디자인 때문에 화물을 싣는데 제한이 있었지만, 단거리 내에서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노략질하거나 교전하기에는 최적의 함선이었다. 따라서 1573년에서 1588년까지 영국은 총 18척의 레이스 빌트 갈레온선을 보유하게 되었고, 16척의 왕실 갈레온도 개조되어 그와 맞먹는 성능을 갖춘 배로 탈바꿈하였다.


3.    가난했기 때문에 탄생한 승리의 주역, 주철대포


“…당시에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청동대포는 특별히 비쌌다… 왕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수입해서라도 만들텐데 영국왕실은 가난했다. 또 청동이 나지 않으니 제련기술의 발달도 기대할 수 없었다… 어차피 청동대포를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없다면 좀 위험하더라도 주철대포를 만들어 보기로 작정했다. 주철은 좀 위험하긴 해도 무엇보다 값이 쌌다.” 


(책 "강자의 조건(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360516)", 이주희 저)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는 한가지 고민이있었다. 대포를 만들어야되는데 청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포는 일반적으로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만들기 쉽고, 녹슬지 않으며, 대포 발사 시 엄청난 압력에도 쉽게 파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동은 영국에서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외국에서 수입하기에는 너무 비쌌다. 영국에서 나는 광물 중에서 대포 생산에 쓰일만한 건 양질의 철광석 뿐이었다. 헨리 8세는 무모한 도전에 운을 걸어보기로 한다.


당시 철로 만든 대포는 청동 대포가 갖는 장점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철은 청동보다 녹는점이 두 배 이상 높았기 때문에 제작이 힘들었고, 쉽게 녹슬었으며, 대포 발사 시의 압력에 금방 부서져버렸다. 그러나 헨리 8세는 랄프 호지 등 프랑스의 유명한 제철 장인들을 불러모아 주철대포를 개발하는데 전력을 기울였고, 1543년 결국 첫번째 주철대포 제작에 성공한다.


주철대포의 가장 큰 장점은 청동대포에 비해 값이 매우 적게 든다는 것이다. 1632년 영국해군의 기록에 따르면, 90톤의 청동대포를 제조하는데 1만 4,332파운드가 드는 반면 주철대포는 같은 양을 3,600파운드에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청동대포의 약 ¼ 가격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철대포는 값이 싼 만큼 보급도 신속히 이루어져 1588년에 이르러 영국 범선들은 이미 소형 혹은 중형 주철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 스페인은 대포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함선과 함선이 서로 측면을 맞대고 보병들이 올라서서 싸우는 백병전으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해전의 교전방식이기도 했다. 따라서 육군 강국이었던 스페인은 보병의 위력을 과신한 나머지 대포의 위협을 과시하였다. 결국 스페인은 영국의 함포 사격으로 인해 백병전다운 백병전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허무한 패배를 맛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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