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것

그리고 그 이후..? 한-미-중 메타포로 체험해보는 병자호란기 조선

by 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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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에서는 어째서 조총을 가진 병력이 기병에 대패할 수 있는지를 매우 잘 고증해냈다. 사거리와 연사속도가 제한된 총은 무적이 아니다.

앞서 말한 '조선국뽕'이라는 정신세계에 있어서는 왜적보다는 만주족이라는 오랑캐가 훨씬 위협적이었다. 조선 지배층의 세계관을 도덕/부도덕과 문명/비문명의 틀로 보자면 도덕적 도통이 이어져온 문명을 담보하는 곳은 중화이며 그걸 계승해왔다 할 명나라가 실존해있었고 그 우위성에 대하여 사대와 조공이 이루어졌고 이를 따르며 조선도 스스로가 도덕적 도통을 따르는 문명국임을 담보하는 셈이었으나, 만주족은 그 구도 자체를 무너뜨리려 했으니까.


이런 구도에서 도덕과 삶 사이를 다루는게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남한산성>이다.


다음은 영화상에서 나오는, 청태종 홍타이지가 인조에게 보낸 서신이다.


"항복하라.

네가 기어이 나의 적이 되어 거듭 거스르고 어긋나 환란을 자초하니 너의 아둔함조차도 나의 부덕일진대 나는 그것을 괴로워하며 여러 강을 건너 멀리 내려와 너에게 왔다.

너는 살기를 원하느냐? 성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 내가 다 듣고 너의 뜻을 펴게 해주겠다. 너는 나와서 두려워 말고 말하라.

너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구멍 속에 처박혀 있어라. 너는 싸우기를 원하느냐? 하늘에 보름달이 차는 날, 내가 너의 돌담을 타 넘어 들어가 하늘이 내리는 승부를 알려주마."


앞서의 틀로 보면 홍타이지를 위시한 만주족도 힘의 우위로 굴복을 강요하는 '오랑캐'이나 여기서는 삶과 죽음의 문제가 더 첨예하다. 임진왜란은 수성이나 몽진같은 퇴로라도 있지 여기는 포위된 남한산성이다. 임진왜란처럼 종주국이 보내줄 원병같은 건 기대할바도 없이 스스로의 힘에만 모든게 맡겨져 있다. 적에게 저항할 힘 같은건 진작에 소진되었고 버틸 가능성은 전혀 없어 온전히 적의 손에 생사가 달려 있는 상황-영화상의 묘사에 의하면-이다. 남한산성이 함락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홍타이지가 아직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없다. 그래서 홍타이지의 말의 근저에 있는 이분법은 설득력이 있다. 굴복하지 않는다면 곧 죽기를 원하는 것이라고까지 하는.


굴복은 삶이요, 저항은 죽음이다. 앞선 틀로 생각해보면

[문명-도덕-죽음] vs. [비문명-부도덕-삶]

의 구도에서 무엇을 택할까다. to be or not to be. 죽느냐 사느냐, 인간사는 언제나 그것이 문제다.

그게 최명길과 김상헌이 서로를 반박하며 논하는 말들의 핵심이다.


선택은 너무나도 쉽지 않나 싶기도 하다. 삶 없이 무엇이 의미가 있겠는가, 살고봐야지. 그래서 영화 <남한산성>에서 삶을 택하는 최명길(이병헌)의 입장은 명쾌하고도 쉽게 이입이 된다. 그렇다면 그와 대척점에 있는 김상헌(김윤석)의 입장은 대체 뭐길래 저토록 최명길이 처절하게 논박해야만 하는 것일까. 최명길만큼이나 설득력이 있는건 아닐까? 그걸 좀 봐보려 한다.


김상헌에 이입해보는건 좀 더 난이도가 높다. 좀 더 재료들이 필요하다.

앞서 설명한 이항대립적 구도에서 삶을 택하는게 쉽고 명쾌한 문제만은 아니다. 오랑캐에게 굴복하는 것은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하라는 말인데 이는 앞선 구도의 틀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보면 곧 문명에서 벗어나 야만의 세계에 굴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논리상 도덕에서 부도덕으로의 이행이다.


이 딜레마를 현대 한국인에게 바로 와닿을수 있게 번안해보자면 다음과 같지 않을지. 일당독재 공산중국이 민주주의 미국을 상대로 아시아 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상황, 미국은 동북아에서 철수[명나라가 누르하치에게 패하고 요동에서 물러난 것처럼]했으며 이윽고 중국은 한국에게 미국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의 패권을 인정하라 요구한다. 그리고 그 징표로서 중국의 체제안정에 위협이 되었던 한국의 레짐체인지가 이루어져야 한다. 서구적 위선에 가득찬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친중정권을 수립하라. 한국현대사에서 민주주의라는게 차지해온 도덕적 위상을 생각해볼 때 그건 단순히 목숨을 위해 얼마든지 바로 포기될만한게 아니다.


아니 그래도 백성을 수탈해대던 양반네들의 위선적인 성리학적 도덕이랑 민주주의를 어떻게 동급으로 비교하느냐고? 어떤 이들의 입장에서는 한국 민주주의도 똑같은 구도에서 얼마든지 위선적으로 비춰질수 있다. 과연 기회의 평등이 있는가, 민의가 개방적으로 열려있는가, 불공정 등 사회의 핵심 문제들이 대의제의 장에서 제대로 논의되고 있는가 등. 직업정치인은 제대로 뽑히고 있는가? 한국이라는 정치공동체는 정말 민주주의인가 반문할지도 모른다. 도리어 스스로의 모순을 가리고 어느쪽이든 쳇바퀴돌듯 서로 바톤터치만 하는 지배층의 고인물 통치를 사실은 정당화하는 상징체계라고 말이다. 조선 성리학이 그랬듯이.




삶을 위해 도덕을 포기할 수 있는가. 논리적으로는 그게 한번 긍정되는 순간, 삶을 위해서 도덕을 언제든지 뒤로 물릴 수 있는 틈이 열린다. 일단 살아야하니까, 배가 고프니까 도덕을 후퇴시키고 난 후엔 이제는 그냥 더 이익이니까, 그게 더 즐거우니까로 도덕을 유보할 수 있는 허들을 낮출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모두가 살기를 바라 아니면 이의 연장선상에서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기꺼이 도덕을 포기한다면, 도덕원칙이라는게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것인가.


때로 도덕은 단순히 옳다 그르다의 테크니컬한 기준점만이 아니라 어떤 한 인간이 누구인가를 이루는 신념과 정체성과 떼어놓을 수 없는 믿음의 핵심이 되기도 한다. 그런 수많은 사례가 있지 않은가, 어떤 도덕원칙은 어기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 버리는. 어떤 도덕률은 어기면 자기 스스로가 용서가 안되는 지점들이 사람이라면 분명히 존재한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치논쟁의 극단화는 대부분 여기에 기인하기도 한다. 정치는 옳음의 문제이며 난 그 옳음을 추구하는 가치있는 인간이며 이에 반대하는 자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가로막는 부도덕한 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향’은 나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기존의 내가 죽게되는 일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건 내가 옳다고 생각하던 믿음을 배반하고 삶과 이익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양이든 서양이든 자신의 도덕원칙을 포기하지 않고 관철시켜 나간 이는 옛날부터 모범적인 상으로 칭송받아오곤 했다. 그게 인간 삶의 중요한 본질인것처럼 꽤나 보편적인 태도로 말이다.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가장 오랜동안 그런 사례의 표본으로 전해져온건 신하국임에도 상(商)나라(흔히, 은(殷)나라라고 더 널리 알려진)의 임금을 죽인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며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일 것이다. 이들은 오랜동안 충절이라는 도덕원칙을 생존이라는 현실원칙을 넘어서까지 관철시키려한 아이콘으로 동아시아 전통에서 수천년간 칭송되어 왔으며 마찬가지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인물들의 표본이 되어왔다.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건 단종 복위를 시도하다 수양대군에 죽어간 사육신 정도가 있으려나.

서양에서도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도망칠 기회를 스스로 버리며 죽음을 받아들인 이례로 권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는게 이상적인 지식인상으로 전해져오지 않았던가. 크게보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도 이 계보에 속할 것이며, 소크라테스로부터 약 2천년 뒤의 인물인 토마스 모어도 왕이 제정한 법에 대한 서약을 거부하고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동서양 어느 종교 어디서나 자신이 믿는 걸 배교할 수 없어 불타거나 못박혀 죽어간 순교자들이 있었고,

혹은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포기하고 굴종하느니 때론 자신의 고국에서 멀리떨어진 타지에서까지 탄압을 감내하며 죽어간 투사들이나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없어 독재정권의 고된 문초에 죽어간 젊은이들이나

(그런 시기를 견디고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얘기가 아님에 유의.)

멀지 않은 시기를 보자면 중국의 탄압 아래 티벳이나 위구르에서 죽어간 이들, 혹은 CIA의 공작에 의한 쿠데타로 대통령궁에서 공습을 그대로 맞으며 죽어간 칠레의 아옌데 같은 이도 여기 더해져야 할 것이다.


모두 같은 구도의 연장선상의 인물들이다. 이들은 도덕을 위해 죽어간 이들이기에 기억된다. 이들을 통해 도덕이 삶 앞에서마저도 죽음으로써 관철되며 도덕이 이렇게 부정되고도 이어지는 세계는 부조리함으로 남게 된다.


세상은 도덕을 어겨도 남아 살아나갈지언정, 도덕률이 도덕으로 남으려면 누군가는 죽어야한다. 매일 주기적으로 나는 잡초처럼 죄를 저지를지라도 그걸 죄로 알고서 고백하는 고해성사가 필요한 것처럼. 약육강식과 부조리함의 파고가 풍토병처럼 반복되더라도 그게 죄가 아님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피를 먹고 자라는건 민주주의만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현실과 부딪히게 될 모든 도덕률은 다소간 그러하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어떤 도덕이든 저 아래 근저에는 언제나 죽느냐 사느냐 삶과 죽음의 문제가 있다라고.


그렇기에 영화에서 살아남을 길을 강조하는 최명길과 대척점에 서 있는 김상헌은, 실제 역사에서와 달리 자결하는 것으로 나온다. 도덕은 삶을 볼모로 삼은 현실 앞에서 죽음으로써 관철될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의 김상헌도 실제로 자결을 시도하긴하나 영화와 달리 살아남아 일생동안 아니 죽은 이후에도 충절과 절개로 칭송받는다. 그리고 이런 명성을 이은 그의 집안은 19세기 조선 최고의 세도가문이 된다. 안동 김씨다. 도덕 앞에 세상은 언제나 아이러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사대부들이 스스로를 고양시키던 도덕적 도통이라는 보편원리에 기초한 조선국뽕은 만주족이 힘으로 새로운 천하를 만들어가던 국제정치 현실에서도 이런식으로 살아남았다 할 수도 있을 거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이들은? 그들에겐 죽어간 이들이 무엇을 남겼을 것인가.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아 나간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다음 글에서 계속)




*최근의 시사이슈에서 도덕 대 삶이라는 화두가 적용될 수 있는거라면 우크라이나 전쟁아닐까. 만약에 이 사태가 핵세계대전으로 커지는 비극이 혹여 발생한다면 그건 우크라이나가 너무도 위대하게 버텨줬기 때문에 확전된 아이러니라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응원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사람이라면.


(202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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