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것?
<한산>을 봤다. 이 영화도 망하면 당분간 한국영화는 힘들어지겠지...하면서 봄.
이 영화의 이순신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마치 목석같다. 신을 모사해야 하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으리라. 인물이 아니라 이콘이라 보는게 더 맞으리라. 몸짓 하나, 대사 하나하나가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성을 담은 그릇에 가깝다. 박해일의 연기력을 볼만한 영화는 아니다.(그럴거면 헤어질 결심 봐라.) 이콘(icon)의 재현은 무언가를 계속 더하는 연기력이 아니라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들을 감하는 다른 덕목을 필요로 할테니까. 그게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 공유된 네러티브의 핵심을 차지하는 신화적 인물이라면...
최민식이 <명량>을 찍으면서 다시는 못해먹겠다 했다지? 그럴만하다. 인간이 어찌 신을 연기할 수 있으랴. 위대한 연기를 할줄 아는 대배우가 어찌 이콘이 될 수 있겠는가. 그건 살아 움직이려 하는 인물을 지향해서는 배겨낼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라면, 박해일은 분명히 성공하고 있다고 평하고 싶기도 하다. 그는 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관객이 느끼고자하는, 영화로 구현되고자 바라마지 않던 형태의 이순신다움을 드러내는데에는 성공했다. 마치 저 이콘의 예수그리스도처럼.
그래서 이 작의 이순신은, 주인공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기보다 관객들이 바라는 관점을 투영한 상징에 가깝다. 영화 내적으로는 와키자카(변요한)나 다른 인물들의 관점을 통해 드러나는 인물(영화 외적으로는 당연히 관객의 관점을 통해 드러나는 인물)이기도 하고. 극의 인물로 더 돋보이는 와키자카나 원균, 어영담 등과 대척점에서 바라보면 그들을 더 돋보이게 하는 이순신은 어찌보자면 도리어 병풍에 가깝다. 그리고...
도리어 진주인공은 따로 있으니 항왜 준사다. 이 영화에서 전투신 외에 주제라고 느낄만한건 각종 홍보자료에도 나오지만 의vs.불의라는 대립구도일텐데, 그 한복판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준사가 차라리 진주인공이라 할만하다. 이순신이 영화 <벤허>에서 예수라면 정작 주인공 벤허는 준사라고 할까나. 내가 보기에도 결말부에서 카타르시스를 주는건 한산대첩의 호쾌한 포격전이 아니라 항왜 준사가 자신의 선택을 보여주는 "의義"의 깃발을 들어올리는 장면이었다.
그때, 느낀 것이다. 아- 조선에 프로파간다 국뽕이란게 있다면 어떤 감수성인지 알겠다라고 해야할까. 단순히 이익이 아니라 의로움을 위해 행하고 있다는 것. 돈과 섹스같은 이익이 전부인 세계에서도 '의'라고 하는건 인간에게 근본적인 울림을 준다고 생각한다.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해도, 그게 주는 근본적인 울림이 있다.
임진왜란은 다른 민족의 침략을 막는 방어전이었고 세계정복을 꿈꾸는 그 다른 민족 무리의 터무니없는 명분에 비하면 당연히 의로운 전쟁이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지도층을 자부하던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그 의로움이 단순히 한 민족의 자율성과 어쩌구 이런 것에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길게 논의해볼수도 있겠으나, 그들은 스스로를 민족이나 한 무리의 이익이라 하는 특수한 개별자에 그치는 옳음을 구현하기에 스스로가 우월하다 여기지는 않았으리라. 성리학을 평생 익히고 수신을 통해 평천하하고자 한 이 무리들은 그 옳음/의로움이란 평천하에 이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다 보편적인 원리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들 지위의 정당화도 이런 도덕적 차원에서 시도되었다.
일본 측의 인물은 그 누구도 이런 류의 옳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땅을 얼마나 차지하고 명예를 얻느냐, 즉 이득에 대해서이다. 아무리 침략자라도 최소한의 포장은 하기 마련이다. 그게 미개한 이들을 문명화시키기 위해서이든, 대량살상무기를 폐기시키기 위해서든,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기위한 거든, 임박한 침략 전의 선제공격을 위한 거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이 작에서의 일본측의 고민과 판단에는 아무런 도덕적 고려가 들어있지 않다. 명분같은 겉포장마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프로파간다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존재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찌 이익에 대해 말하십니까, 오로지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라는 맹자의 말은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들릴 것인가.
명분이든 뭐든 스스로의 정당화를 '도덕'으로부터 끌어오고 그걸 문명이라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부류는 비문명이요 야만이라 부를밖에 없다. 그래서 그렇게 불렀을까, '오랑캐'라고.
그래서 조선의 사대부들이 숭상해마지 않던 시각을 끌어다보면, 이순신(박해일)과 와키자카(변요한)의 싸움은 곧 의와 불의의 싸움이요, 문명과 야만의 대결이며, 곧 원리상 보편과 특수의 다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한산'은 한민족 네러티브의 중요한 신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국뽕'영화임을 부정하기는 힘드나, 그 국뽕의 핀트라는게 현대의 우리가 국뽕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한민족의 위대함이라는 이미지라기보다는 과거 사대부가 느꼈을 '조선 국뽕' 자체를 체험하게 해주는건 아닐까. 이 전쟁의 구도를 단순히 한일대결이 아니라, 영화에서 신성을 담은 이콘인 이순신의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의와 불의'의 대결이라고 하자면 그러해 보인다.
이런 '조선국뽕'이라 부를만한 흐름은 실제 역사에서도 꽤 유구히(?)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다른 '오랑캐'가 등장한다. 만주족이다. (다음 글https://brunch.co.kr/@ganro/21/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