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프로젝트 연말 행사를 하는 날이었다. 회사를 가지 않아서 그저 즐겁기만한 날 이기도 했다.
팀원들을 이끌고 앞장서 들어간 압구정, 지하에 있던 보드 게임방은 한가하게 젠가를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가짜 돈으로 게임하면 안 되는 퀴퀴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눈치를 챈 후엔 기침도 못할 정도로 숨죽여 시간만 채웠고 내가 불법 도박이라도 한 것처럼 도망치듯 나왔다.
그것도 에피소드처럼 느껴져 즐거운 날이었다.
마지막 순서로 세련된 플라워 카페에 팀원들을 모아 두고 서로에게 응원삼아 남긴 롤링페이퍼를
본인들에게 나눠주며 깔깔거리고 있던 때였다. 그때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일을 하고 있을 때 전화를 하는 일은 별로 없었기에 잠시 침을 삼키며 긴장을 다스리고 전화를 받았다.
"저녁에 시바를 입양하러 갈거야"
이미 저녁이었다. 지금 갈테니 오라는 말이었다.
모두가 웃고, 모두의 시간이 흘러가는데, 나 혼자 조용히 정지했다. 내 표정은 나도 모르게 심각해졌고, 아마 입 안에서 혀를 씹고 있었을 것이다.
가끔 나는 나도 모르게 혀를 씹는다. 집중할 때도 씹고, 불안할 때도 씹고, 정 줄 놓고 신날 때도 씹는다.
혀를 씹다가 구내염도 여러 번 났기 때문에 고치고 싶었지만, 의식하고 씹은 적이 없기 때문에 고칠 수가 없다. 나중에 나중에, 시로를 입양할 때도 나는 처음엔 혀를 씹었다.
결혼을 한 뒤 어쩔 수 없이, 지금 와서 생각해도 염치없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나는 한 동안
내 신작 개발 프로젝트에 전념하느라 퇴근이 늦었다.
아내의 회사는, 작정하고 바라보면 서로 바라볼 수 있는 맞은편 건물에 있었다.
하지만 매일 10시를 넘기는 나와 다르게 5시면 퇴근을 했기 때문에 한 동안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다.
아내는 활발한 편이어서 저녁 약속도 종종 있고 집에 친구들이 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결국 나 없는 저녁을 혼자 보내는 때가 많았고, 신혼이었고,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TV 안에서는 아내가 좋아하는 드라마가 끊임없이 새롭게 돌아갔지만 현실은 나 없이, 혼자서 같은 시간을 다람쥐 챗바퀴처럼 뱅글뱅글 돌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 동안 나도 혼자 회사에서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만 어떤 이유도 아내의 외로움을 변명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아내가 찾아낸 방법이 반려동물 입양이었다. 언젠가 키운다면 지금이다.
아내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한 번 시바견을 가정 분양을 한다는 글을 읽고 명동 앞까지 주인을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아내는 공장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을 분양하지 않는다는 굳은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정 분양만 원했다. 우리가 함께 본 '강아지를 생산하는 공장' 영상에서 몸도 누이기 힘들 만큼 좁은 창살 안에서 강제로 교배당하고 아이를 낳는, 삶의 의지를 모두 잃어버린 공허한 눈을 가진 모견을 봤기 때문이었다.
명동에서 만난 견주는 중고물품이라도 파는 것처럼 츄리닝 차림으로 나와 돈을 주고 가져가라는 식으로 굴었다. 모견을 보고 싶다는 말에 집을 치우지 않았다는 변명을 하며 끝까지 보여주지 않았다.
분양을 가정한 업자. 연락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포기하고 돌아왔다.
아내의 전화를 끊고는 급하게 공식 모임을 파하고 팀원들 모두가 좋아하도록 법인 카드만 넘기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연말 분위기를 지워버릴 만큼 들뜬 아내가, 집에서 나갈 채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글은 강아지가 주제인 글이 아니기 때문에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강아지를 보러 갔고, 너무 예뻤고, 좋은 주인들이었고, 나도 갑작스러움을 넘어 이 입양을 받아들였고,
우리는 강아지를 데려오지 못했다.
어떻게 아셨는지 장인어른에게서 전화가 왔고 크게 만류를 하셨다. 아내는 평생 아버지를 거스르지 못했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아내는 그 전보다 두 배, 더 외로워했다. 나는 그런 아내를 보며 혀를 씹는 경우가 잦아졌다.
"내일 고양이가 올 거야", "뭐?"
모모라는 고양이는 갑자기 집으로 왔다. 1살도 채 안된 어린 고양이였는데, 그때는 고양이를 몰라서 나이를 짐작하지 못했다.(지금은 알려주지 않아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모래가 잔뜩 든 박스도 같이 왔는데, 난생처음 보는 물건이었지만 고양이용 화장실이라는 것은 바로 알 수가 있었다. 모래로 덮지 못한 똥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고양이는 청결을 매우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아마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모모를 키우던 주인은 사업을 시작하게 되어 급하게 거제도로 내려갔다. 갑작스럽게 홀로 남겨진 아이는 주인이 여자 친구에게 부탁했는 데 맡아주기가 어려웠던지 2주간 방치되어버렸다고 한다.
밥은 산더미처럼 뿌려놔서 산화된 채 흘러내리고 있었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변은 감출 수 없을 만큼 쌓여있었다. 이걸 들은 아내는 이 아이를 잠시 맡기로 결정했다.
모모는 아메리칸 컬이라고 불리는 고급 묘종이었다. 예뻐서 인기가 많지만 특이한 귀 모양 때문에 관련 질병에 취약하다.
모모는 한 달 정도 우리와 살다가 데리러 온 주인과 함께 거제도로 갔다.
이 한 달 동안 나는 고양이에 대해서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1. 고양이는 아침에 다리를 감싼다.
2. 고양이는 얼굴을 제외한 곳을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3. 고양이는 물건을 떨어트리지 않는다.
이때 고양이에 대해 배운 것 중 대부분이 쓸모없다는 사실은 몇 달 뒤에 알게 됐다. 그 이야기는 시로 구레의 이야기를 풀며 천천히 풀어서 할 생각이다.
나에겐 3번이 매우 중요했다. 고양이는 어디든 올라갈 수 있으니까 여기저기 올려둔 물건이 다 상할 거라고 생각했다. "강아지는 손 닿지 않는 곳에 물건을 두면 괜찮아. 그런데 고양이는 그럴 수 없잖아.", 그게 나의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고양이는 물건을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녔다. 마치 그 자리에 물건이 없는 것처럼, 아무리 복잡한 미로를 꾸며놔도 조그마한 발을 미로 사이사이에 리듬 게임하듯이 정교하게 올려두고 우아하게 걸었다. 경이롭고 고혹적인 캣워크에 매우 감탄했다.
걱정은 걱정이고 고양이의 매력은 매우 간드러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을 마시러 나오면 어디선가 튀어나와 내 다리에 몸을 감쌌다. 처음 감싸던 날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 마치 내가 이 아이의 보호자로 선택(간택이라고 표현한다)됐다는 생각에 감격스럽고 날 의지하는 표정을 바라보았다. 너무 예뻐서 어딘가 만지려고 하면 그건 또 안된다는 의사표현을 했다. 의사표현, 그래 개와 고양이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의사표현에 있지.
강아지는 어딘지 자기 의사를 밝힌다기보다는 주인의 행동에 종속받는다는 느낌이 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어딘지 돌보아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어린아이를 돌보는 느낌이 든다.
반면 고양이는 자기 의사가 분명했다.
-좋아. 싫어. 음 이건 별로인걸? 나 혼자 있고 싶으니까 건드리지 마.
좋아하는 것에는 표정과 소리, 발을 감싸는 행동으로 답변했고 싫은 일에는 발길질과 이빨로 보복했다.
만지는 것도 그랬다. 처음엔 예쁘다고 강아지처럼 턱이나 허리, 배를 만져주려고 했다가 (배는 특히 안된다.) 모모에게 크게 혼났다.
"거기 만지면 죽여버릴 거야."
모모는 가끔 이마 부분을 조금 만질 수 있게 허락해줬는데, 기분이 좋아 보일 때면(츄르를 먹고 난 직후, 자고 일어나서 처음 만났을 때 등) 눈치를 보면서 손끝으로 머리 끝을 살살 만져볼 수가 있었다. 손바닥으로 만진다든가, 오래 만지려고 하면 순식간에 앞 발차기(손이라고 할 때가 더 많다)가 날아왔다. 1살도 채 안된 아기임에도 손이 제법 매서웠다. 회사에 가서 이야기했더니 고양이를 키우는 분이 만져야 할 곳을 알려주었다. 아뿔싸, 너는 강아지가 아니구나.
모모는 꼭 게임할 때면 관심을 달라는 듯 책상 위에 앉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늘 물어봐야 했다. 왜 주인이라고 안 하고 집사라고 하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나도 나름 고양이 키우기에 대한 로망 몇 가지가 있다. 그중 최고는 고양이를 팔에 안는 것이었기 때문에 2주 정도 후,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물어보고 시도를 해봤는데 팔뚝에 가느다란 세 줄의 상처가 생겨버렸다. '좀 더 친해져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포기했다. (나중에 주인이 왔을 때 모모를 안는 것을 보며 부러웠는데 금세 그의 팔에도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며 기분이 풀렸다.)
혹시 안 데려갈 수도 있지 않을까?
2주 정도 지났을 때는 집사가 데리러 올 것을 알면서도 '혹시' 이대로 데리러 오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걱정 씌운 소망을 가지고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날은 야속할 정도로 정해진 시간에 왔고 한 달의 시간은 하루 만에 마치 없던 것처럼 사라졌다.
다행히 모모의 집사 눈에선 꿀이 떨어졌다. 한 달이 야속하게 자기 집사에게 쪼르르 달려가 보여준 적 없는 애교를 피우는 것을 보고 섭섭하면서도 안도했다. (안고 있는 집사 팔에 새 상처는 내주었지만)
헤어질 것을 아는 만남은 유독 미리 진하게 아쉽고 헤어진 후엔 조금 덜 그립다. 그 날 전까진 심장이 뛸정도로 아쉬웠고 모모가 떠나간 후 며칠은 모모가 너무 그리웠다. 아침마다 맨살에 감아오던 매혹적인 털. 용케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며 짓던 흐뭇한 표정. 사향 냄새나는 변에 모래를 덮던 낯부끄러운 현장까지 보고 싶었다. 모모의 사진을 보며 즐거워하던 나도 그리웠다. 모모의 밥이 있던 자리. 화장실을 두느라 정리해서 왠지 횅한 공간까지 빈자리가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리움은 바다에 쌓은 모래성처럼 빠르게 풍화됐다. 결국 떠나갈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모모는 우리에게 고양이에 대한 생각을 크게 바꿔주었다. 아내는 고양이 발톱 공포증이 있었는데 가끔 모모의 발톱에 긁혔지만 잘 잘라주면 큰 문제가 없었다. 나는 고양이가 물건을 망가트린다는 망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아한 캣워크와 함께 고민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고양이가 더 좋아라든가. 고양이를 키워볼까? 는 아니었다. 그냥 모모는 너무 예쁜 아이 었구나. 강아지가 아니라 고양이도 좋구나. 정도의 감상이 남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