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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온나길 Mar 26. 2020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됐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리뷰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원제: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스틸러/2013

  -1시간 54분(114분)

 ※스포일러 주의! 영화 내용이 담긴 글이므로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see behind walls, to draw closer, 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 That this is the purpose of 'Life'. - <라이프>의 모토                                      


                                                                                            

                          

 여기 월터 미티라는 중년 남자가 있다. 그는 어릴 때 보드대회에 나가 상을 받기도 하는 등 모험심 넘치는 소년이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직장인이다. 해외여행은 해본 적 없고, 피닉스 주에 가본 것이 그나마 이색적인 경험의 전부. 그는 <라이프>라는 잡지사에서 원화필름을 담당하는 업무를 맡아 오래 근무를 해왔지만, 그나마도 회사가 매각되고 칼바람이 불고 있는 판국이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일까? 월터는 종종 깊은 상상에 빠지는 버릇이 있다. 회사에 호감을 가진 상대도 있지만, 정작 현실에서 월터는 e-하모니라는 매칭 사이트를 통해서조차 윙크 보내기(호감표시)를 한참동안이나 망설인다.



 그러던 어느 날, 월터는 16년간 호흡을 맞춰온 유명한 사진 작가 숀 오코넬에게서 마지막 선물이라는 쪽지와 함께 마지막 필름을 받는다. 이제 회사가 이번 잡지를 마지막으로 온라인으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그 필름과 동봉된 지갑에는 <라이프>의 모토가 새겨져 있다. 쪽지에는 '25번 사진이 내 최고의 작품'이라는 말도 덧붙여져 있다. 그런데, 아뿔싸! 그 필름들 사이에는 기가 막히게도 25번 필름만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도 심란한데, '25번 사진을 꼭 마지막 표지로 써달라'는 숀 오코넬의 특별한 당부 편지로 인해 월터는 더 곤란에 빠지게 된다.



 이후 영화는 월터가 사진을 찾기 위해 숀 오코넬의 행방을 쫓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월터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인지 상상을 많이 한다. '어? 여기까지가 상상이었어?' 싶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연출이 흥미로운데 이 연출 덕에 중간부터 월터가 겪는 일들도 또 월터가 하는 상상일 것처럼 느껴지고, 어느 순간 '어? 현실이야?' 싶은 생각이 든다.                                    



                                                                                        

                            

 월터 인생의 분기점은 숀 오코넬을 찾아 그린란드로 가기로 선택했을 때 갈린다. 처음 월터가 숀 오코넬이 있을 장소 후보였던 뉴저지와 그린란드 중 그린란드로 실마리가 좁혀졌을 때 보인 반응은 '거길 어떻게 가;' 하는 망연함이었다. 그런데 월터가 직접 그린란드에 가고, 숀 오코넬이 타고 간 배를 따라잡기 위해 술에 취한 조종사의 헬기를 타는 등의 선택을 하면서 상상의 횟수가 줄고 상상보다 더한 현실들을 겪는다. 아이슬란드에 가고, 화산 폭발을 경험하고…. 월터가 그린란드로 가서 숀 오코넬을 직접 만난다는 선택을 하고 나서 갑자기 현실이 상상처럼 스펙터클해진 것이다.



 여기서 중간중간 토드(e-하모니라는 관계 매칭 사이트 관리자)와 통화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재밌다. 처음에는 피닉스 주에 가본 경험 정도가 월터가 얘기할만한 이색적인 경험의 전부였는데, 그 후에 토드와 통화를 할 때마다 누가 들으면 허풍쟁이구나 싶게 경험이 갱신되는게 체감된다. 월터가 정말 상상같은 현실을 경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연출이었다. (히말라야에서 핸드폰이 터진다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이슬란드에까지 숀 오코넬의 자취를 따라가지만 결국 눈앞에서 놓치고 만 월터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해고와 실의였다. 그런 와중에 월터는 실마리였던 25번 전후의 필름들 중 일부가 자신의 일상에 자리잡고 있던, 아주 가까이 있던 것들이라는 걸 깨닫는다. (어머니의 오래된 피아노의 일부라던지)



 그리고 그는 가방과 여행일기를 챙겨 다시 숀 오코넬을 만나러 떠난다. 이때 월터가 챙겨간 것은 어릴 때 해외여행을 가려다 못간 이후 새 것으로 남아있는 여행가방과 여행일기인데, 그랬기에 더 좋았다.

                                    


                                                                                                                         

        

 작은 거인, 라즈쿼위, 워로드……. 해고돼서 이제 필름을 찾을 필요가 없음에도 숀 오코넬을 찾아 떠나면서 월터는 숀 오코넬이 계획을 휘갈겨 놓은 종이에 있던 알 수 없는 말들, 피상적인 단어에 불과했던 것들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그 경험들을 스스로 여행일기에 적는 기록의 형태로 독백하는 것도 인상깊다. 단어에 숨이 불어넣어져서 입체적이 되는 느낌이랄까. 비로소 월터의 일부가 된, 살아 움직이는 경험이 된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월터는 숀 오코넬을 만난다. 사실 난 필름과 계획을 적은 종이로 귤케이크를 포장한 걸 보고 월터한테 따라오라고 흔적을 남긴 건가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튼 갑자기 히말라야에서 월터와 조우하게 된 오코넬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그곳에서 둘은 눈표범을 본다.   

                                 



어떤 때는 안 찍어.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 난 개인적으론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                                      

                                                              

           

 왜 눈표범의 사진을 찍지 않냐는 월터의 질문에 오코넬은 이렇게 답한다. 이 말이 더 인상적이었던 건 문제의 25번 사진을 오코넬이 눈표범 같은 것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보통 영화나 소설에선 모험 끝에 주인공이 복직되거나 반전으로 높은 자리가 주어지는 일이 기대되곤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멋진 새로운 직장이 그의 앞에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터의 인생은 그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잡혔을 때도 아프간에 어떻게 갔냐는 직원의 질문에 월터는 예멘을 통해서 갔다고, 거기가 항공값이 84달러였다고 말한다. 그 장면은 웃기기도 했지만 월터의 변화를 분명히 보여준다. 지금은 형편이 안 돼서 못 간다거나 그 밖의 여러 이유가 붙을 수 있는데 가려면 저렇게도 가지 싶으면서, 원래의 월터였다면 안 갔을 텐데 싶었다. 오코넬을 만나자는 명확한 목표만 생각하니 그런 결단이 가능했나 싶기도 하고.



 월터가 구직활동을 위해 이력서를 쓰는 장면에서 그린란드에서부터 겪었던 일들을 나열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와, 진짜 꿈 같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었네 싶었다. 첫장면에서 심각하게 지출내역을 갈겨쓰고 셰릴에게 윙크를 보낼까 말까 한참이나 망설이던 걸 생각하면 월터의 삶은 이미 달라졌고, 그가 이미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25번 사진, <라이프>의 마지막 표지는 월터 미티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이 더 인상적인 건 그가 달라진 후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 일에, 자기 삶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5번 필름이 지갑에 있었고, 쪽지에 '안을 봐'라고 적혀있었던 걸 떠올려 연결해보면 그 장면과 함께 내 삶을 곰곰이 곱씹어보게 된다. 어쩌면 삶이란 본인은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느끼기 어렵지만, 그냥 그 모습 그대로도 눈표범처럼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월터의 로맨스도 그의 여정처럼 요동친다. 영화 초반에 월터가 폭발하는 건물에서 셰릴(월터가 좋아하는 여자)이 키우는 강아지를 구해주는 상상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중후반쯤에 그린란드에 다녀온 월터가 셰릴의 아들에게 롱보드를 주려고 갔을 때 전 남편이 문을 열어주는데, 황망해진 월터의 시야에 셰릴이 키우는 강아지가 보이는데 상상과는 견종이 다르다. 현실과 상상은 다르다는 느낌을 주는 연출이었다.



 그때 월터가 포기했으면 그렇게 월터의 로맨스는 실연으로 끝났을 테지만, 후반부에 셰릴 뒷모습을 보고 달려가서 말을 걸면서 예정된 것 같던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토드에게 셰릴이 사이트에서 탈퇴했다는 말을 이미 들은 후였기에 셰릴이 전남편과 재결합했나보다 확신할 수 있는 일종의 근거까지 접했는데도 월터는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는다. 사실 공원에서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라고.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았기에 월터는 셰릴이 재결합을 한 게 아니며, 셰릴 또한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종종 국내에 개봉할 때의 제목이 자극적이기만 하고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원제목보다 국내 개봉된 제목이 더 좋았다. 영화와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이런 걸 초월번역이라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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