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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온나길 Dec 31. 2021

돌고 돌아 비로소 보이는 풍경

책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리뷰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매트 헤이그/노진선/(주)인플루엔셜

 -출간연도: 2021

 ※스포일러 주의! 소설 내용이 담긴 글이므로 소설을 아직 읽지 않은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http://aladin.kr/p/p4Foz


 노라 시드는 죽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고양이 볼테르가 거리에서 죽고 근무하던 악기점 스트링 시어리에서는 해고당하고, 일주일에 한 시간씩 가르치던 피아노 레슨도 잘린 날 밤의 일이었다.


 그녀가 둔 모든 수는 실수였고, 모든 결정은 재앙이었으며, 매일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에서 한 걸음씩 멀어졌다.
 수영 선수. 뮤지션. 철학가. 배우자. 여행가. 빙하학자. 행복하고 사랑받는 사람.
 그중 어느 것도 되지 못했다.
 심지어 '고양이 주인'이라는 역할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혹은 '일주일에 한 시간짜리 피아노 레슨 선생님'도. 혹은 '대화가 가능한 인간'도.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눈을 떴을 때 노라는 생소한 곳에 서있다. 벽마다 책이 빼곡한 도서관에 들어가자, 어릴 때 함께 체스를 두곤 했던 엘름 부인이 보인다. 도서관 사서인 엘름 부인은 이곳을 '자정의 도서관'이라고 소개한다.


이제는 진부해진 표현이지만 B(irth)와 D(eath) 사이에 C(hoice)가 있듯, 자정의 도서관(Choices)은 삶과 죽음의 중간 지대에 존재한다.


 현재 노라는 삶과 죽음의 사이에 있고, 이 도서관에는 무수한 선택의 갈래에서 뻗어나간 다른 삶들이 존재한다. 이곳에서 노라는 자신이 살 수 있었던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다. 이 도서관에는 가능한 모든 형태의 삶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를 알 수는 없고, 이전에 했던 선택에서 이어진 삶의 '오늘(현재)'을 살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노라는 자신의 선택이 영향을 미친 삶을 살 수 있을 뿐, 어떤 특정한 오늘을 선택할 수 없다. (ex. 볼테르가 살아 있는 오늘, 엄마가 살아 있는 오늘)


 노라는 <후회의 책>을 펼쳐 읽는다. 책에는 노라가 평생 해온 후회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삶에 속해 있을 때도 그랬듯, 노라는 그 후회들을 감당할 수 없다. 노라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다. 엘름 부인은 노라에게 가장 후회가 되는 선택을 돌이켜 다른 삶을 살아보기를 권유한다.


 가장 후회가 되는 것…. 노라는 전 남자친구 댄을 떠올린다. 노라는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댄과 파혼한 일을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그 일로 상심한 댄은 술에 빠져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그때 댄과 결혼해 펍을 운영하는 댄의 꿈을 함께 이루었다면…. 노라는 파혼하지 않고 댄과 결혼한 삶으로 들어간다.



 펼친 책의 첫 문장을 읽자, 노라는 어느 새 펍 앞에 서있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댄과 노라는 펍을 운영한다는 꿈을 이룬 것이다! 거기다 이 삶의 노라는 더 건강해보인다. 처음에 노라는 기뻐한다.


 그런데 미련과 후회가 걷히자 잊고 있던 것들이 떠오른다. 댄은 노라를 은근히 무시하는 말을 하곤 했고 노라가 밴드 활동하는 것을 싫어했다. 노라가 댄과의 연애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 작곡한 곡을 들려줘도 시큰둥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그는 노라가 자신의 꿈(펍 운영)을 함께 이뤄주길 바랐지만 정작 노라의 꿈은 지지해주지 않았다.


 곧 노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삶에서 댄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 이 삶의 댄은 원래의 삶에서 댄이 폐인이 되어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노라가 화가 나 '어떤 삶에서 당신은 결혼 전에 차여서 폐인처럼 산다'고 하자 댄은 코웃음만 친다. 그는 사과는 커녕 뻔뻔스레 굴 뿐이다. 겨우 30분 남짓 살았을까. 노라는 그 삶에 실망해 도서관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그녀가 살지 못해서 슬퍼했던 삶이었다. 살지 못해서 자책했던 삶이었다. 존재하지 못해서 후회했던 순간이었다.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우리는 이미 내린 선택의 결과만을 알기에 쉽사리 나쁜 선택을 했다고 믿어버린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결과가 어떨지는 결코 알 수 없다.


 노라는 볼테르가 죽던 날 밖에 내보내지 않는 선택을 한 삶으로 들어간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봐도 볼테르는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 노라는 침대 밑에서 싸늘해진 볼테르를 발견한다.


 사실 볼테르는 제한심근병이라는 선천적인 병이 있었다. 원래의 삶에서 볼테르는 노라가 정성껏 돌본 덕분에 모든 삶 중 두 번째로 오래 살았고 최고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노라는 볼테르가 계속 살아 있는 삶을 원하지만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라는 자신의 선택이 영향을 미친 현재만을 살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이번에 노라는 단짝인 이지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에 간 삶을 선택한다. 원래의 삶에서는 이지와 오스트레일리아에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가 파토를 내는 바람에 사이가 서먹해졌다.


 이 삶의 노라는 이지랑 가기로 했던 곳과는 다른 지역에서, 이지가 아닌 낯선 사람과 동거하고 있었다. 노라는 이 삶에서 이지가 노라의 생일파티에 오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넌 선택은 할 수 있지만 결과까지 선택할 수는 없다는 걸.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건 좋은 선택이었어. 단지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았을 뿐이지."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번번이 삶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펼쳐지자 노라는 성공한 삶을 원한다. 수영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는 삶. 그건 아빠의 말에 따르면 '성공이 보장된' 선택이었다.



 이 삶에서 노라는 아빠의 말대로 누가 봐도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해 훈장도 받고 돈도 많았다.


 거기다 이 삶에서는 아빠가 살아계셨다! 노라가 국가대표가 되면서 아빠도 운동과 관리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의 삶에서 사이가 틀어진 오빠 조는 노라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고 매우 행복해보였다. 확인해보니 친구 이지도 노라와 접점은 없지만 살아 있었다. 당장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앞두고 있다는 것만 빼면 이번 삶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이 삶에서 아빠는 다른 국가대표 선수의 엄마와 바람을 피우고 재혼한 상태였다. 이 삶의 엄마는 원래의 삶에서보다 더 일찍 돌아가셨다. 노라는 자신의 몸에서 자해한 흉터를 발견한다. 이 삶의 노라도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노라는 아빠가 원하는 선택을 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아빠는 노라의 헌신을 알지 못했다. 이 삶의 노라는 모두가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을 쟁취했으나 자기 자신을 잃었다.



 빙하학자가 되어 스발바르에 간 삶에서 노라는 위고 르페브르를 만난다. 그는 노라와 같은 '이동자'다. 도서관, 비디오 가게, 레스토랑 등… 저마다 형태는 다르지만 노라와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 사이의 회색 지대에서 다른 삶을 살아보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깊은 후회로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갈망한다.


 노라는 북극곰을 맞닥뜨렸을 때, 그토록 원한다고 생각했던 죽음을 앞두고 믿을 수 없는 사실을 깨닫는다.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노라는 아직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잊어버린다. 경도와 위도가 얼마나 긴지 무감각해진다. 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광활한지 깨닫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일 거라고 노라는 짐작했다.
 하지만 일단 그 광활함을 알아차리고 나면, 무언가로 인해 그 광활함이 드러나면,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희망이 생기고 그것은 고집스럽게 당신에게 달라붙는다. 이끼가 바위에 달라붙듯이.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후회에 골몰할수록 시야는 좁아진다. 우리는 좁아진 시야로 졸아들고 졸아들다 결국 자신을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어버린다. 노라는 다른 삶들을 살아보며 우주의 광활함을, 삶이라는 것의 광활함을 피부로 느낀다.


 밴드 라비린스를 계속해 락스타가 된 삶에서 노라의 깨달음은 세밀한 형태를 이루어가기 시작한다.



 그 순간 노라는 깨달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이 삶에서 노라는 세계 투어 중이었고, 믿을 수 없게도 좋아하는 배우인 라이언 베일리와 사귀다 결별한 상태였다. 노라는 명성을 얻었고, 수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 삶이야말로 자신이 선택할 삶이다! 노라는 잠시 그렇게 믿었다.


 삶에는 더 좋은 선택, 꼭 맞는 답이 있다기보다 그 선택에 따르는 저마다의 결과가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삶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공존한다. 이 삶의 노라는 다른 이유들로 피폐해져 있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댄이 그랬듯 밴드의 멤버인 라비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삶 외의 다른 삶이 어떤 모습일지 모른다. 원래의 삶에서 라비는 노라가 밴드를 탈퇴하는 바람에 밴드가 해체되자 노라를 원망한다.


 막상 밴드를 계속하는 삶에서 라비는 불행하다.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은 모두 노라에게만 쏠려 있다. 이 삶에서도 라비는 노라에게 분노를 품고 있다.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한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후회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원망을 쏟아낸다.


 "삶에는 어떤 패턴이…… 리듬이 있어요. 한 삶에만 갇혀 있는 동안에는 슬픔이나 비극 혹은 실패나 두려움이 그 삶을 산 결과라고 생각하기 쉽죠. 그런 것들은 단순히 삶의 부산물일 뿐인데 우리는 그게 특정한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슬픔이 없는 삶은 없다는 걸 이해하면 사는 게 훨씬 쉬워질 거예요. 슬픔은 본질적으로 행복의 일부라는 사실도요. 슬픔 없이 행복을 얻을 수는 없어요. 물론 사람마다 그 정도와 양이 다르긴 하겠죠. 하지만 영원히 순수한 행복에만 머물 수 있는 삶은 없어요. 그런 삶이 있다고 생각하면, 현재의 삶이 더 불행하게 느껴질 뿐이죠."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스트링 시어리 대신 동물보호소를 선택한 삶, 남편과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삶…. 교사, 요가 선생, 안전요원, 작가, 엄마, 피아니스트, 여행 블로거, 칼럼니스트, 사진 편집자, 친환경 건축가, 국제 구호원, 체스 챔피언, 역도 선수, CEO, 비서…….


 자정의 도서관에는 살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삶이 있다. 모든 삶에는 슬픈 경험과 기쁜 경험이 함께했다.


 노라는 무수한 삶을 거치며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제 그만 정착하고 싶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뭘 원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포기하려는 노라에게 엘름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폰은 체스판의 반대편 끝에 도달하면 다른 기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다.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넌 그걸 깨달아야 해. 체스판에 폰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경기는 끝난 게 아니야. 한 사람은 폰 하나와 킹 하나만 남고, 다른 사람은 기물이 다 있어도 경기는 아직 진행 중인 거야. 설사 네가 폰이라고 해도, 아마 우리 모두 그럴 테지만, 넌 폰이 가장 마법 같은 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 폰은 하찮고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왜냐하면 폰은 절대 그냥 폰이 아니니까. 폰은 차기 퀸이야. 넌 그저 계속 앞으로 나아갈 방법만 찾으면 돼. 한 칸 한 칸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그러다 반대편 끝에 도달하면 얼마든지 다른 기물로 승급할 수 있어."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체스에서 폰은 장기로 치면 졸(卒)에 해당한다. 가장 평범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폰이지만, 폰은 체스판의 반대편 끝까지 나아가면 퀸이 될  있다. 엘름 부인은 노라에게 '사소한 것의 중요성'과 '계속 나아가는 것'에 대해 강조한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9110&docId=1839607&categoryId=49110


 노라는 여러 삶을 통과하며 후회와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벗어던졌다. 초반에는 다른 사람의 꿈을 이루기를 원했지만 이제는 다른 기준으로 삶을 선택한다. 친절. 볼테르를 묻는 것을 도와준 의사 애쉬가 커피를 마시자고 했을 때 수락한 삶이다.


 애쉬와 노라는 결혼을 해 몰리라는 딸을 낳았다. 노라는 이 삶을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노라는 케임브리지에서 석사를 취득했고, 지금은 안식년을 보내며 좋아하는 소로에 몰두해 책을 집필하고 있다. 이 삶에서는 오빠 조와도 사이가 좋다. 노라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고, 부유하다.



 노라는 많은 것을 후회하며 살 수도 있었을 무수한 삶을 열망했으나 사실 가장 갈구했던 것은 사랑이었다. 노라가 원래의 삶을 못 견뎌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볼테르마저 떠나고 나자 사랑을 주고받을 상대 없이 덩그러니 홀로 남았던 것이다.


 노라는 이 삶을 원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진심으로 원하는 삶을 찾으면 자정의 도서관에 대한 기억이 서서히 사라지고 그 삶에 안착한다고 했는데, 기억이 아직 선명했다. 노라는 이 삶에서마저 떠나게 될까봐 전전긍긍한다.


 진짜 엘름 부인을 만나러 베드퍼드에 온 노라는 뜻밖의 을 목격한다. 원래의 삶에서 노라의 옆집에 살던 배너지 씨는 요양원에서 지내고, 노라가 피아노를 가르쳤던 리오는 가게의 물건을 훔치다 경찰에게 체포 당한다.


 "모든 삶에는 수백만 개의 결정이 수반된단다. 중요한 결정도 있고, 사소한 결정도 있어. 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때마다 결과는 달라져. 되돌릴 수 없는 변화도 생기고, 이는 더 많은 변화로 이어지지……."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원래의 삶에서 노라가 배너지 씨에게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약을 타다주곤 했다면, 이 삶에서는 노라가 베드퍼드에 없었다. 원래의 삶에서는 노라가 리오에게 싼 가격으로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지만 이 삶에서는 리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다.


 노라가 일하던 스트링 시어리는 석 달 전 폐업해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점장인 닐은 노라가 우울한 얼굴로 손님들을 내쫓는다고 말했지만, 스트링 시어리는 원래의 삶 외의 다른 삶들에서 이미 폐업을 한 상태였다. 닐의 생각과는 반대로 오히려 노라가 악기점에서 일했기 때문에 가게가 더 오래 유지됐던 것은 아닐까?그런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노라는 자신의 사소한 선택들이 생각지 못하게 여러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끝내 노라는 이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노라가 이룬 삶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선택하고 그 과정을 감내해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사이. 마침내 저울 추가 한 곳으로 기울자 자정의 도서관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도서관은 노라의 마음이 한 방향(죽음)으로 기울 때마다 불안한 징조를 보여왔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노라는 '살기 위해'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도서관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도서관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원래 삶을 찾아 스스로 써나가야만 한다.


  주변에 불길이 휩싸이고 천장에서 떨어진 돌에 깔려서도 노라는 포기하지 않고 버둥거린다. 도망치고 싶었던 삶을 기꺼이 갈구한다. 자신의 삶을 찾아낸 노라는 책을 펼쳐 들고 만년필로 적기 시작한다.


 노라는 책에 적기 시작했다. 노라는 살고 싶었다.
 그렇게 쓴 후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라는 예전에 엘름 부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고 싶다'는 흥미로운 말이지. 그 말은 결핍을 의미해." 그래서 노라는 그 문장 위에 줄을 긋고 다시 썼다.
 노라는 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라는 다시 썼다.
 노라는 살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살고 '싶다'는 말은 상태의 결핍을 의미한다. 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노라는 대문자, 일인칭 현재 시제로 꾹꾹 눌러 쓴다.


 "나는 살아 있다."



 노라의 성 시드는 Seed(씨앗)를 연상시킨다. 씨앗은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포도밭을 소유하거나 캘리포니아 석양을 봐야 할 필요는 없다. 심지어 넓은 집과 완벽한 가정도 필요치 않다. 그저 잠재력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노라는 잠재력 덩어리였다. 왜 전에는 이걸 몰랐는지 노라는 의아했다.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때로는 진부해보이는 말이 더없이 담백하게 진리의 핵심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되곤 한다. 여정을 통과해야만 보이는 풍경이라는 게 있다. 얼핏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돌아오는 과정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원래의 삶에 돌아왔을 때, 노라의 삶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고양이는 죽었고, 실직한 상태인데다 오빠나 친구 이지와의 관계는 소원하다. 달라진 건 노라의 내면 뿐이다.


 "우린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것만 알아.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결국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일 뿐이야. '중요한 건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지."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관점이 달라진 후 마주한 삶의 면면은 기존에 알던 것과는 다른 색채를 띠었다. 그동안 노라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해왔다.


 밴드를 탈퇴한 일로 배신감을 느껴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오빠 조는 알고 보니 엄마가 돌아가신 후 끔찍한 실연까지 겪어서 스스로를 갈무리하기도 벅찬 상태였다. 이지는 6월 중에 영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라며 친근한 답장을 보내온다.



 죽기로 결심했을 때 노라는 자신을 블랙홀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사라지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 거라고 믿었다. 원래의 삶으로 돌아온 노라는 자신을 화산이라고 정의한다.


 역설적이게도 화산은 파괴의 상징인 동시에 생명의 상징이다. 용암이 흘러내리는 속도가 느려지고 열이 식으면, 용암은 응고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부서져 흙이 된다. 비옥하고 영양가가 풍부한 토양이 된다.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시간이 흐르면 용암이 흘러내리는 속도는 느려지고 열이 식는다. 용암은 응고되고 부서져 이윽고 흙이 된다. 우리는 그 비옥한 토양에 얼마든지 숲을 가꿀 수 있으리라.


 모든 일을 겪은 노라 시드가 체스판을 앞에 둔 모습은 삶(체스판)의 수많은 선택을 앞두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현재의 노라는 인생의 다음 선택을 기꺼이, 즐거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며 카바피의 시 <이타카>가 떠올랐다. 이타카는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의 고향이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10년을 떠돌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간다.


 대부분 우리는 삶에서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끝없이 달린다. 이 시에서 '이타카'가 삶이자 삶에서 원하는 그 무엇이라면, '완성'하거나 '성취'하는 것보다 이타카를 향하는 여정 그 자체가 더 중요하고 값지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콘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않고
네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콘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 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이타카 ITHACA,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그리고 체스를 두는 데 올바른 법은 없어. 그저 많은 방법이 있을 뿐이야. 인생과 마찬가지로 체스에서는 가능성이 모든 것의 기본이야. 모든 희망과 꿈, 후회,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의 기본이지.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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