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를 먹을 수 있는 유전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듣고는 단번에 결론을 내렸다. "나는 애초에 고수를 먹지 못하는 DNA를 타고났어."
그도 그럴 것이, 우리 가족 중 누구도 고수를 먹지 못하는데, 고수를 즐기는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웬만해서는 온 가족이 고수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고수를 접했던 날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인데, 학교 앞 먹거리 골목에 베트남 쌀국수 가게가 오픈한 날이었다. 베트남 요리를 접해보지 못했던 갓 스무 살의 나는 '현지 음식'이라는 낭만에 빠져 호기롭게도 고수가 들어간 쌀국수를 주문한 다음, 한 입 맛보고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이 세상 모든 비누를 합한 후 그것을 딱 한 방울로 농축한 진액을 넣은 것 같은 국물은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맛이었기에 결국 나는 한 입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나는 뼛속부터 고수를 낯설어하는 사람으로 태어났고 아직도 그 첫맛의 여운이 깊게 남아 '고수'의 'ㄱ'만 들어도 강렬한 비누로 혀를 씻은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혜수와의 나트랑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으레 당연한 '맛집 찾기'까지도 미뤘다. 여행에 대해서 나는 다소 고집스럽고 이상한 논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인들이 가지 않는 현지 맛집을 직접 찾아가 보는 것에 대한 낭만이었다.
'현지 문화를 느끼려고 여행을 가는 것인데, 왜 굳이 한국인 입맛에 맞는 식당을 가는 거야?' 하는 나만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에 '~~ 맛집'으로 검색하여 찾아가는 것보다는 내 발걸음이 이끌고 내 코가 먼저 반응하는 현지 식당에 무작정 가는 것을 더 선호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인생 최초로 베트남 쌀국수를 먹고 느낀 고수에 대한 충격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억나기 시작했다. 베트남 음식이라면 마치 우리네 마늘처럼, 대부분의 음식에 고수가 잘잘히 갈려 들어가 있을 것 같았고, 고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음식을 먹은 나는 충격에 사로잡혀,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 맛집'에 대해 검색한다는 등의 대응체계를 세우지 않았다. 일단 부딪혀보기로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고수라는 녀석과의 대결에서 승리해 돌아오리라, 생각도 했다.
다행히 혜수는 여행지 맛집 검색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구글맵을 통해 수십 군데의 '나트랑 맛집' 정보를 담아왔었다. 나는 혜수의 선택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첫날 점심은 나트랑 시내의 쌀국숫집으로 결정했다. "혜수, 나 고수 못 먹는다."
쌀국숫집으로 향하면서 나는 그녀에게 일러두었다.
"아 맞나, 괜찮다. 나는 먹을 수 있다."
아,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수 DNA를 갖고 태어난 그녀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도착한 국숫집은 시내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한국인이 많이 찾는 맛집이라서 인지 '뚝배기 쌀국수'라는 메뉴를 주문할 수 있었다. 이내 고수가 들어가 있지 않은, 사골국과 매우 비슷한 음식이 나왔다.
첫날 방문했던 쌀국숫집
고수가 다른 그릇에 담겨 별도로 나오기는 했지만, 씹지만 않으면 견딜 수 있는 정도이므로 나는 무난히 인생 첫 현지 쌀국수를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해치웠다. '오, 이 정도면 너무나 괜찮잖아?'라는 생각을 했다.
첫날 저녁으로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현지인 술집으로 향했다. 이곳은 말 그대로 로컬 술집으로, 아직 한국인들에게 정평이 나있지는 않은 곳인지 한국어 메뉴판이 없었다. 왠지 우리만 아는 아지트에 온 것 같은 마음에 살짝 성취감이 들었다. 한 접시에 한화 5천 원 정도밖에 안 하는 메뉴를 마음껏 주문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고수가 들어있으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음식 가격이 저렴하므로 고수가 들어있다면, 그것은 혜수용으로 넘겨주고, 나는 'NO 고수'라고 종업원께 말씀드려 새로운 음식을 추천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첫날 저녁 방문했던 현지 맛집
결과적으로, 고수는 그 어떤 음식에도 들어있지 않았고 소스로 살짝만 제공될 뿐이었다. 고수가 들어간 연두색 소스를 젓가락으로 콕 찍어 먹기만 해도 농축된 비누에 혀를 샤워하는 것 같았지만, 그 정도는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음식에 마늘이 듬뿍 들어간 것들이 많았기에 마늘러버인 나의 입맛에 무척 맞았고, 심지어 가격까지 저렴해서 원하는 것을 마음껏 시켜 먹을 수 있었다. 천국같이 느껴졌다.
둘째 날 점심으로 먹은 나트랑식 월남쌈 '넴 느엉'
둘째 날 점심에는 나트랑식 월남쌈이라고도 할 수 있는 '넴 느엉'을 먹으러 갔다. 넴 느엉 재료로 부추와 시소, 상추, 그 밑으로 고수가 잔뜩 제공되었지만, 부추와 상추 등 다른 야채를 무한으로 리필할 수 있었고, 소스류에서도 고수의 'ㄱ'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음 편히 음식을 즐겼다.
그러니까 나트랑에 머물렀던 3박 4일 동안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고수와 조우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나마 고수가 말도 없이 등장하는 경우는 소스류 뿐이었는데, 이마저 반납을 해버리고 나면 고수를 만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도대체 그 많을 줄 알았던 고수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애초에 내가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베트남 음식에 은근한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저절로 생각이 들었다.
둘째 날 저녁에도 고수는 소스로 등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한국인 관광객이 주된 손님층이라, 가게에서 '알아서' 고수를 빼줄 법한 식당만 다닌 것도 아니었다. 발 밑으로 도마뱀이 기어 다니고 창틀에는 날파리들이 모여있는 식당에 갔을 때 메뉴 고민 없이 주문했던 음식에도 고수가 없었던 것은, 내가 운 좋게 그것을 피해 다닌 덕분일까? 아니면 혜수가 나를 위해 검색하여 주문한 덕분이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넷쨋 날 점심으로 먹은 쌀국수는 한식이라 믿을 뻔 했다.
심지어 어떤 쌀국수는 갈비탕과 무척 흡사해서, 비법 육수를 캐리어에 넣어오고 싶기도 했다. 또 어느 쌀국수는 육개장과도 너무 비슷해서 원래는 국물 음식을 잘 먹지 않는다고 여기던 나의 식성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현지 길거리 음식에도 고수는 없었다.
길거리 음식에도 고수는 없었다. 이쯤 되니 고수를 못 먹는다고 해놓고, 그것이 없음을 아쉬워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데, 사실 여행 중에는 무척 다행이라 여겼으면서도 그 야채가 제대로 들어간 음식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비로소 제대로 느끼니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 많을 줄 알았던 고수는 누가 다 먹었을까? 참 신기한 일이야. 운이 좋았어.'
생각하며 밤늦게 출발하는 베트남항공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눈을 붙였다가 맛있는 냄새에 일어났더니 기내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밤도 늦었는데 음식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맛만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간이 테이블 위에 따뜻하게 놓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적당히 매콤한 소고기 덮밥이 꽤 맛이 좋았고, 옆에 닭고기 요리로 추정되는 것을 포크로 크게 집어 입 안에 욱여넣자마자 '퉤퉤.'
결국 고수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등장했다.
입술에 닿자마자 알 수 있는 고수의 향연. '나트랑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온 줄 알았는데, 역시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했구나.'
이상한 허탈함에 살짝 웃음은 나왔지만, 그토록 애태웠던 것을 만나고 나니 오히려 마음 한편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