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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Jun 26. 2020

성과사회 속 피로한 현대인들에 대해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서평

 아침 출근시간 서울의 BMW (Bus, Metro, Walk)는 현대인의 모습을 가장 축약적으로 보여준다. 바쁘고 피곤한 현대인들이 먹고사니즘을 위해 샌드위치처럼 끼어서 이동하는 그 모습은 사람보다는 짐짝에 가깝다. 그렇게 짧게는 30분 길게는 2시간 그 이상을 전쟁처럼 보내고 나면 인류애가 사라진다고들 자조적으로 말하곤 한다. 그리고 김영하는 현대인의 일상 즉 출근시간 속에서 엘리베이터에 낀 사내라는 하나의 사건을 삽입시킴으로써 현대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풍자한다.


 19세기 영국에서 첫 등장한 기차와 자동차는 시간에 의한 공간의 소멸 현상을 가져왔다. 동일한 시간에 몇 배의 공간적 거리를 정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오전 9시까지 도달해야 하는 거리가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설 속 공간들은 BMW를 통한 회사에서 집으로, 엘리베이터를 통한 층에서 층으로의 이동으로 등장한다. 압축적인 기술발전으로 가능하게 된 빠르고 먼 공간의 이동은 현대인들에게 피로함을 자아내면서 이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분노로 귀결된다.


오층을 지나가면서 보니 엘리베이터는 문이 열린 채로 육층과 오층 사이에 걸쳐 있었고 엘리베이터 아래로 사람의 다리 두 개가 대롱거리고 있었다. 한쪽 발은 신발이 벗겨져 있었다. 죽었을까 살았을까. 그때 내 앞으로 위층에 사는 사람들이 바삐 나를 밀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중략...) 발가락이 꿈틀거렸다. 말이라고 할 수 없는 신음도 흘러나왔다.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를 구해낼 힘도 시간도 없었다.


 주인공 정수관은 자신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발견한다. 그 남자의 생사여부를 궁금해하는 순간, 자신의 위층의 사는 사람들은 자신을 밀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시간은 곧 돈이다. 회사원의 출근시간은 그중에서도 가장 비싼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밀치고 빠르게 내려간 위층 남자는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모른 척 함으로써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고, 그 덕에 정수관보다 위층에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체력과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현대인은 더 비싼 택시를 타거나 자가용을 산다. 만약 정수관이 자동차를 샀다면 출근길 버스사고를 경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는 핸드폰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도 드러난다.


핸드폰을 사든 지 해야지 원, 나는 핸드폰을 사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사고가 난 버스를 타기 직전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구하기 위해 핸드폰을 여기저기 빌려보지만, 아무도 빌려주지 않는다. 면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그의 외관은 초라해 믿을 수 없고, 다들 바쁘고 피곤하기 때문이다. 핸드폰은 멀리 있는 사람과의 연락을 가능케 하기에 서로를 더 잘 연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작품이 나온 90년대 후반의 핸드폰보다 더 진보된 스마트폰은 도리어 인간관계를 보다 단절시켰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대인들은 관계의 단절에서 야기된 불편함, 번거로움은 자본, 상품 획득만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고 있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방관하거나 정수관을 잡고 하소연을 한다. 길거리의 아줌마는 자신의 핸드폰 요금을 탕진한 청년에 대해, 엘리베이터에 함께 갇힌 미스 정은 간접흡연을 야기하는 흡연자들에게, 회사 엘리베이터 관리인은 대기업 재벌들에게 분노한다. 자신의 과도한 피로와 그를 야기한 상황에 대한 원인을 어디서든 찾아내고 단정 짓지 않으면 그것은 곧 나의 잘못, 자기혐오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 이 모든 건 면도기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었다. 지각한 사유와 내 옷차림에 대하여. 나는 말했다. 아침에 제가 사는 엘리베이터에 누가 끼였구요. 버스는 트럭하고 충돌했고 사람들은 핸드폰을 빌려주지 않았고 지갑을 놓고 나오는 바람에 회사에 전화도 할 수 없었고 버스에선 치한으로 몰리는 바람에 회사에 전화도 할 수 없었고 (...중략...)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뭐가 미안한지 뭐가 죄송한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미안하다고.


 상사에게 지각에 대해 말하는 정수관의 말은 전혀 비현실적이지 않다. 평생에 한 번도 일어날 수 없었을 많은 사건들이 오늘 자신에게 일어났을지언정 현대인은 회사에 정시에 도착해야만 한다. “회사만이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이유는 그곳에서 돈을 벌고 계층, 신분을 규정받고 불안감을 해소시킬 소비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인은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해 시간의 안정적인 구조를 철거하고, 삶의 시간을 파편화하고, 연결과 결속을 허무는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신자유주의적인 시간 정책은 두려움과 불안을 낳는다. 정수관이 오로지 회사에서만 그 불안을 해소하고 구원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 소설이 개정되기 이전 회사의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정수관이 불평하는 대사에서 김영하가 생략시킨 문장이 있다. “아무리 다른 엘리베이터가 다섯 개나 있어도 그렇지. 예수께서도 그러셨잖아요. 아흔아홉 마리의 멀쩡한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요.” 이 문장은 소설의 주제의식을 너무도 확고히 보여주기에 소설이 다소 촌스러워질 수 있어 작가가 생략했으리라 추측된다. 이는 빠르게 움직이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소외되는 소수 즉 엘리베이터에 낀 누군가를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현대인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출근시간인가? 일상 세계는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삶의 세계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살아가는 세계이며 그렇기에 별다른 관심이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생활세계이다. 따라서 이 일상 즉 출근시간이야말로 현대인들의 가장 내밀한 가치관과 생활양식들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정수관은 사내 이면지 재활용에 대해 인센티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공선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대인들은 반드시 이윤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현실은 다행히도 보다 희망적이다. 조직 구성원의 행동을 분석하고, 조직이 원하는 성과를 끌어내는 방법을 배우는 조직행동론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선의에 의해서 행하던 일에 금전적 보상이 주어지면 더 이상 개인은 그 행동을 멈춘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 또한, 개인은 단지 물질적인 유인에 의해서만 아니라, 주변인과의 관계를 통해 더 많은 성과를 낳는 것을 증명하는 ‘호손 실험’ 역시 그러하다.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금전적 보상보다는 인정과 소통을 해야 함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1) 김왕배, 『도시, 공간, 생활세계』, 한울, 2011
2) 한병철,『타자의 추방』, 문학과 지성사, 2017
3) 신승희, 「현대사회의 불안을 보는 한 문학적 시선 -김영하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분석」, 2016, 한국 현대문예비평 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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