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로써 본질로서 존재하다.
Q: 그런데 그 두 그룹(샤이니, 에프엑스)은 콘셉트가 난해하다는 평도 있어요.
A: 늘 목표는 하나에요. 의도하고 목적한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했는가. 목적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대중과 소통하려 해요. 어차피 모든 사람을 다 이해시킬 순 없어요. 서로간에 친절함의 정도가 다른 법이죠.
- 2013년도 OSEN에서 진행한 민희진 빅히트 CBO(前 SM 크리에이티브 총괄 이사)의 인터뷰
Q : 그래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나?
A : 추구하는 의도와 목적. 만약 작업 과정에서 최초 의도가 훼손되는 경우가 생기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
- 2015년도 GQ에서 진행한 민희진 CBO의 인터뷰
아렌트는 한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고, 그 사람이 죽을 때 그 사람의 우주가 소멸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필자의 모든 언행은 단 한 가지 질문에 대한 갈구이다.
‘나는 누구인가’
또 때로는 말로, 때로는 행동으로 표현하나 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한 가지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필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적절한 답을 갈구하는 삶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필자가 죽을 때쯤, 혹은 그 후에야 옳았는지 옳지 않았는지 판가름 날 것이다. 물론 그 판가름 또한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어떻게 그 답을 갈구해야 할 것인가. 나 밖의 세계와 교류해야 한다. 거울을 보지 않고서는 내 외적인 모습을 확인 할 수 없듯, 세상에 비추어진 나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타인과의 교류 역시 위의 질문에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답'이며, 이를 '본질'이라 일컫고자 한다. 본질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라 정의한다면, 필자는 스스로의 본질을 바탕으로 각 상황에 적합한 면모(Identity)를 드러내고 그에 대한 피드백(Image)을 얻는다. 그 피드백은 다시 필자의 본질에 크거나 작은 영향을 끼치고, 필자는 변화한 본질, 즉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새로운 대답(반드시 획기적 변화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을 바탕으로 타인과 교류한다. 타인과 교류하지만 그 교류의 목적은 온전히 ‘나' 자신을 향한다. 이기심도, 이타심도, 혹은 그 외의 성향도, 그저 그러한 면을 드러내는 스스로가 자연스럽고 만족스럽기 때문에, 다시 말해 본질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따름이다.
본질:=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나름의 답.
필자 자신, 그리고 우리 모두는 플라톤의 동굴에 갇힌 채 살고 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묶인채 동굴 벽만 보며 사는 것이다. 목을 결박당해 머리를 좌우로도 뒤로도 돌릴 수가 없다. 다만 등 뒤에 횃불이 타오르고 있고, 횃불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스스로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며, 할 필요도 없다. 그림자를 살피며 스스로가 누군지를 알아내는 것, 본질을 갈구하는 것만이 유의미하면서도 유일한 선택지이다.
본질이 어떠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시점에서는 스스로가 어떠한 사람이라고 나름의 대답을 하겠지만, 그것은 그 ‘시점’이라는 변수를 투입한 결과이다. 예컨대, 20대에는 자아성취를 추구하던 사람이 40대에는 안정성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물론 그 반대여도 마찬가지이다. 선택은 그저 그 사람의 궤적을 반영할 뿐이다. 모든 사건은 앞을 바라보면 우연이나, 뒤를 돌아보면 필연이다. 우연이 쌓여 필연을 만들고, 누적된 필연이 우연의 스펙트럼을 제한한다. 이 사람의 20대가 이 사람의 40대를 만들었으나, 20대의 이 사람과 40대의 이 사람은 같으면서도 동시에 같지 않다. 이는 20여년에 달하는 사건의 축적에 기인한다. 30대의 이 사람은 20대의 이 사람이 만들어온 궤적 상에서 선택을 내리고 사건을 발생시켰겠으나, 그 궤적이 제시하는 것은 일정한 스펙트럼일뿐 그 스펙트럼 중 어떠한 점을 선택할지는 우연 혹은 무작위성이 작용한다. 같은 부모를 둔 형제 자매가 다른 모습이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듯, 20대의 이 사람과 40대의 이 사람이 다른 선택을 함은 자연스럽다. 본질은 결과값이 아니라 함수 그 자체이다. 그러나 종단에 이르기 전까지는 원 함수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어떠한 방향성이라 표현함이 정확하다. 환언하면, 본질은 스스로가 살아온 삶의 궤적에 바탕을 둔 추세선이다. 이 추세선 주변(임의의 시그마)의 일정한 스펙트럼에서 언행을 선택하지만 예외적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은 상존하며, 그 사건은 새로운 추세선을 산출해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A 시점에서는 내가 B의 그래프를 가진 사람일지, C의 그래프를 가진 사람일지 알 수 없다. 그건 종단에 이르러서야 사후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종단에 이르러 확인한 그래프의 모양은 동굴 안의 내가 그림자로써 알고자 한 스스로의 모습과도 같다.
필자는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있는 삶의 방법론이 기업 및 브랜드에도 적용될 것이라고 ‘믿는다.’ 기업 스스로가 어떤 기업인지, 어떤 기업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함이 옳다고 믿는 것이며, 소비자와의 교류 역시 기업의 본질을 찾기 위한 과정이라 믿는 것이다. 소비자와의 교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욕구의 충족이다. 기업은 각각 나름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과 대비되는 기업의 특징은, 인간은 그 자체로 존재가 자명하나 기업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기업은 나름의 originality를 확보해야 한다. 기업은 나름의 방식으로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존재의 이유가 있다. 소비자는 그 기업을 통해서 특정 욕구를 충족시키며, 그래서 그 기업을 선택하고 소비한다. 기업의 본질은 소비자의 어떠한 욕구를 충족시킬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답이다.
기업의 본질 := ‘어떤 욕구를 충족시킬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답.
기업 활동의 목적이 수익 창출임은 부인할 수 없으나, 수익 창출을 위한 맹목적 수익 창출은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한다. 필자는 수익 창출이 ‘본질에 대한 자각과 추구’에 후행할 것이라 믿는다.(충분조건까지는 아니겠으나 필요조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이 브런치는 그 믿음에 대한 검증이다. 본질에 대한 논의를 기업에 적용하면 아래의 그림과 같다.
기업은 소비자에게 정체성(Identity)을 투사한다. 이는 비단 광고나 마케팅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특정 기업이 판매하는 제품/서비스에서도 정체성은 드러나며, 같은 상품을 판매하더라도 어떤 식으로 상품을 개발하고 어떠한 면모를 강조해 판매하는지, 나아가 어떤 사람을 CEO로 선임하고 어떤 사람들을 채용하는지, 어떤 사람들에게 우수한 평가를 내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을 구성하는지 등 소비자가 해당 기업을 접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통한다.
소비자는 기업이 투사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이미지(Image)를 형성하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한다. 이미지는 상품의 매출에서 단적으로 드러날 것이며, 매출이 아니더라도 선호도 조사나 브랜드 평판, 신입사원 채용 경쟁률 등의 방법으로 표출될 것이다.
기업은 피드백을 일정 수준 수용하여 변화한 정체성을 다시 소비자에게 투사한다. 이 같은 순환과정이 그리는 궤적이 곧 본질이며, 동시에 그 궤적이 가리키는 방향이 본질이다.
본질 ⊃ {과거의 궤적, 미래의 방향}
기업을 바라봄에 있어 그 기업의 사업, 전략, 행보를 평가하기 위해 사용할 기준은 단 한 가지이다.
그것이 그 기업의 본질에 부합하는가.
그 기업이 걸어온 궤적에 부합하는가.
그래서 자연스럽고, 또 개연성이 있어 소비자를 소구할 수 있는가.
본질로써(과거의 궤적에 기반을 두어) 본질로서 존재하고 있는가(미래로의 방향을 그리고 있는가).
이러한 시각이 앞으로 기업들을 살펴봄에 있어 사용할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