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청송 빌라에 새로운 ‘식구’가 등장했다. 1965년생 아빠와 1966년생 엄마의 외동딸로 태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갓난아기 시절을 청송 빌라에서 보냈다. 강남에서 강동으로, 다시 경기도로 집을 옮긴 지금은 할머니, 엄마, 아빠, 나 이렇게 네 명이 한 지붕 아래에서 살고 있다. 핵가족화가 급속히 진행된 이 시대에 그리 흔한 가족의 형태는 아니다.
대치동에 위치한 모 영어학원에서 만나 결혼식을 올리신 부모님은 지금도 학원을 운영하시며 남들보다 늦게 아침을 맞고 늦게 하루를 마무리하신다. 오전 10시쯤 일어나 식사를 한 뒤, 오후 1시에 집을 나서 오후 11시가 다 돼서야 집에 돌아오시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저녁 식사와 약주를 즐기신다. 서로 시간대가 안 맞으면 각자 배꼽시계에 맞춰 밥을 먹고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 집은 ‘삼시 세 끼를 같이 먹는 것이 가족이다!’라는 가훈 하에 식사 시간을 맞춘다. 저녁때가 되어 배가 고파도 웬만하면 참았다가 부모님이 퇴근하시면 그제야 야식으로 저녁밥을 먹고 잠을 잔다.
이런 우리 집의 총주방장님은 할머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힘든 부모님을 대신해 학창 시절 내 아침밥은 항상 할머니가 챙겨주셨다. 엄마 말에 의하면 할머니는 엄마가 어릴 적부터 한식은 기본이요, 일식, 중식, 양식 등 동서양을 넘나드는 요리 실력의 소유자이셨다고 한다. 열한 살쯤 인가 일 년 반 동안 엄마와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적이 있다. 유학 준비를 하던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바로 할머니의 요리 비법 전수 시간이다. 결혼 후 제대로 요리를 해본 적 없는 엄마가 걱정된 할머니는 하나뿐인 딸과 손녀가 먼 타국 땅에서 굶을까 매우 초조하셨다. 그래서 할머니는 엄마를 붙잡고 수라간 최고상궁 마마님처럼 기본양념 제조 방법, 재료 다듬는 법, 재료별 조리 방법을 눈을 감은 채 줄줄 읊으셨고, 엄마는 그걸 받아 적었다. 일주일 넘는 기간 동안 전수된 레시피 덕분에 미국에서도 집 밥다운 집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음식 솜씨는 인정하는 바이지만 성격은 물과 기름이다. 잠깐 다섯 살 때의 일을 이야기하자면, 동네 슈퍼에서 풍선껌을 산 뒤 껍질을 까서 나에게 주시는 할머니 때문에 생떼를 부렸었다. 다른 껌을 골라 내 손으로 껍질을 까서 입에 넣자 그제야 조용해졌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할머니와 나, 우리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향을 지녔다. 허 씨 집안인 할머니는 남을 위해 베푸는 것이 큰 기쁨이시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잘 쓰시고, 특히 부엌일에 관해서는 깐깐한 본인만의 규칙을 가지고 계신다. 반면 안 씨 집안 피가 흐르는 나는 아빠를 닮아 무뚝뚝하고 내 일은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당연히 식사 시간에는 할머니와 나의 신경전이 이어진다. 물컵이나 밥그릇 위치가 다른 식구들의 젓가락 동선과 겹치지 않고 옛 관습에 맞아야 식사를 시작하시는 할머니와 달리, 나는 그런 거 잘 모르겠고 내 밥은 내가 차려서 빨리 먹고 치웠으면 좋겠다.
또한 어릴 때부터 밤낮이 바뀐 생활 습관과 잦은 야식 섭취로 인해 날씬한 몸매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나는 살에 대한 콤플렉스와 다이어트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정성이 듬뿍 들어갔지만 염분 또한 가득한 할머니의 음식보다는 건강식이나 간단한 원 플레이트 음식이 먹고 싶다. 무엇이든 챙겨주고 싶어 하시고 식구들의 식사는 본인께서 책임지셔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할머니와 밥 한 끼 맘대로 챙겨 먹지 못해 아침부터 짜증을 내는 나 사이에서 매일 같이 갈등이 일어난다.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어떤 식재료를 쓸지 손수 정하는 재미를 느끼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 그래서 극단적이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 집을 나왔다. 대학을 일본 교토에서 다니게 되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스무 살 때부터 자취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할머니가 엄마를 미국으로 떠나보낼 때 그랬듯이, 엄마도 밥 한 번 제 손으로 지어본 적 없는 딸을 일본으로 보내려니 불안했나 보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 , 아플 때 먹을 음식, 혼자 술 한 잔 하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안주 레시피를 손수 타이핑하고 코팅까지 해 내 가방에 넣어 놓았다. 그걸 보면서 따라 해 봤지만 처음에는 밥도 제대로 못 지어 덜 익은 쌀을 씹어 먹고 반찬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다. 조금 헤맸지만 한 달 정도 지나니 감이 잡혀서 잘해 먹고살았다. 일본은 독신가구가 많아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되는 반찬이나 소분된 식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다. 거기에 잡곡을 잔뜩 넣은 따끈따끈한 밥에 먹고 싶은 반찬 두어 가지와 된장찌개, 순두부찌개, 김치찌개를 돌려가며 먹었다. 건강에 좋다는 메뉴도 개발해 만들어 먹었다. 식사 사진을 찍어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면 지 혼자 아주 잘 먹고 잘 산다고 우스갯소리로 말씀하셨다.
이런 나도 유학생활이 길어지니 할머니가 해주시는 푸짐한 집 밥이 그리워졌다. 내 손으로 밥 해 먹고 싶어 집을 나온 내가 집 밥을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한국 음식점이나 한인 마트가 있었지만 본토의 맛이 나지 않았다. 슈퍼에서 파는 김치에는 뭔 놈의 당근을 그렇게 채 썰어 넣어서 달짝지근하던지. 한 잎 베어 물면 유산균이 입 안 가득 퍼지는 알싸한 김치 맛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인 아줌마가 하는 식당 음식마저 일본에 현지화된 맛이 났다. 그래서 메뉴에 한국'풍’이라고 적어 놓았던 것인가. 아무래도 간장으로 맛을 내는 일본의 밍밍한 맛에 질려 고추 가루와 고추장 맛이 그리워졌나 보다. 한국인끼리 모여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을 때면 항상 떡볶이나 닭볶음 탕 같은 매운 음식을 해 먹었다. 다 먹고 코에 맺힌 땀을 훔치며 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아, 냉면, 치킨, 보쌈, 족발 먹고 싶다.’ 매운 음식이야 자취생 실력으로 대충 만들 수 있었지만, 노하우가 집적된 배달 음식 맛은 감히 흉내를 낼 수 없었고, 파는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먹방이나 요리 프로그램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거나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 리스트는 내가 방학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가기 일주일 전 엄마와 할머니에게 전달한다. 신이 나신 할머니는 간장새우니, 겉절이니,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신 뒤 고이고이 쟁여두시고, 엄마와 아빠는 마트에 가서 술과 기타 안주거리를 사 오신다. 긴 이동 시간 끝에 한국 집에 도착하면 꿈에 그리던 메뉴로만 채워진 식탁이 눈앞에 있다. 이상하게 귀국 만찬을 즐기는 날에는 평소 하지 않던 표현들이 튀어나왔다. 너무 맛있어서 눈이 커진다던가, 밥이나 반찬을 더 달라고 한다던가, 술잔이나 앞 접시 하나하나 신경을 쓰게 된다던가. 해외에서의 자취 생활이 없었다면 내가 할머니에게 ‘이거 너무 먹고 싶어요’라든지 ‘이거 만들어주세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었겠지. 그리고 집 밥이 그립고 따뜻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겠지. 가족들도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은 다른 일을 제쳐두고 식탁 위에 둘러앉아 얼굴을 보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한 시간을 즐겼다. 잠깐 동안의 만찬이 끝나면 나는 일본으로 돌아가 자취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자취방으로 돌아갈 생각에 신이 난 나를 공항에서 배웅해주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공항버스에서 내려 집 근처 갈비 집에서 양념 게장을 포장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걸 안주 삼아 막걸리와 함께 적적함을 삼키시고 주무셨다.
약 5년간의 일본 생활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터를 옮긴 지 벌써 반년이 넘었다. 그리고 집 밥은 다시 그리운 존재에서 애증의 존재로 바뀌었다. 왜 항상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걸까? 혼자 밥 해 먹고 싶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으로 도망간 주제에 유학생활 동안에는 집 밥이 그리워 잠을 못 이뤘고, 한국 본가로 돌아온 지금은 내 식사에 대한 주도권을 내가 쥐고 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할머니와 나의 성향 차이는 예전에 비해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최근에는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난 탓에 하체에 살이 붙기 시작해 예민해져 서로에게 주는 스트레스는 더 심해졌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엄마와 함께 외식을 하며 고민거리를 털어놓는다. 외식을 하면 그릇은 저 쪽에다 놓고 먹어라, 이 집은 양념이 맛이 없다, 음식 남기면 아까우니 배불러도 다 먹어라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잠깐이나마 내가 먹고 싶은 음식에만 집중하며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 끼니마다 할머니가 정한 음식을 할머니가 원하는 방식대로, 할머니가 원하는 양만큼 먹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내 고민을 듣는 엄마는 ‘역시 독립만이 살 길’이라고 말한다. 단, 독립 전까지는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서로 양보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할머니가 이렇게까지 요리에 집착하시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존재 가치를 확인받고 싶으셔서이다. 항상 일이 바쁜 부모님이나 나와 달리 할머니가 하실 수 있는 건 요리밖에 없다. 그래서 나머지 가족들이 일에 몰두하는 동안 할머니도 부엌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시며 이 집안에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어필하시는 것이다. 주택관리사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아빠나 가끔 집에서 작업을 하는 나는 하루 종일 부엌에서 들리는 물소리나 쨍그랑 소리가 신경 쓰이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도 다 이 이유에서다. 여든이 가까우신 할머니가 다른 분들에 비해 정정하시고 근력이 좋은 이유도 다 가족을 위해 메뉴를 구성하고, 부엌에서 하루를 보내시는 것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쁜 와중 식사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시는 할머니 때문에 화가 나는 이유는 내가 혼자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인 것 같다.
옛날처럼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음식을 불평 없이 잘 먹기에는 내가 너무 깍쟁이처럼 변했고, 하루 세 번 가족 모두가 시간 맞춰 밥을 먹기에는 일과 시간에 좇기는 뻑뻑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 매일 하루 세 번 얼굴 붉히며 식사할 바에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즐겁게 모여 먹고, 나머지 시간은 각자의 생활을 즐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이미 깊게 뿌리 잡은 습관은 바꾸기 힘들 것 같다.
만약 이 갈등이 먹고사는 행위 중 ‘사는’ 게 바빠서 생긴 것이라면 아빠의 주택관리사 시험이 끝나고 엄마의 사회복지사 실습이 끝나고 내가 진짜 작가로 불리는 날이 오면 덜 해질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독기를 품고 달려도 부족한데 하루에도 몇 번씩 밥 먹는 것 때문에 싸우게 되어 마음이 좋지 않고 감정의 골만 깊어진다. 독하게 노력해 꿈을 이루고 싶은 나의 소망과 따뜻한 집 밥 먹으며 웃을 수 있으면 그게 최고의 행복이라는 할머니의 말씀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 너무 어렵다. 어떻게 해야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모두가 웃으며 식사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다시 ‘식구’가 되어 편안한 얼굴로 식탁에 앉을 수 있는지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