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의 서비스를 이용하다 보면 이런 일이 있다. 나는 분명히 'OO의 집'에서 물건을 샀는데 ‘XX플레이스’라는 정체불명의 이름이 카드명세서에 찍히는 것이다. 이런 일은 생각보다 꽤 많다.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만들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일단 회사 이름부터 정해야 한다. 어떤 곳은 대표가 그냥 일필휘지로 이름을 정해버리기도 하고, 어떤 곳은 며칠 밤낮을 브레인스토밍과 마인드맵핑과 다트 던지기 등등의 프로세스를 거쳐 이름을 정하고 법인설립을 완료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앱을 28개쯤 개발하다가 어느 하나가 대박이 터지는 경우가 보통의 스토리 아닐까.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토스'는 알지만 '비바리퍼블리카'는 의류 브랜드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배달의 민족'을 만든 '우아한 형제들'을 K팝 작곡가와 혼동하기도 하며, '아이디어스'를 검색하다가 '백패커스'가 나와서 여행사 사이트에 잘못 들어갔나 하고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곤 한다.
사설이 길었다. 굳이 대박난 회사들 이름을 예로 들어가며 말을 꺼낸 이유는, 아직 대박나지도 못한 주제에 회사 이름과 서비스 이름이 달라서 일찌감치 법인명을 바꾼 우리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예비창업패키지에 선정되고 나서 가능한 한 빨리 법인을 설립하는 게 좋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회사 이름을 무엇으로 정해야 하는지는 한 일주일쯤 고민했던 것 같다. ‘위토피아’는 내일학교 시절 진행했던 페스티벌의 이름이기도 하고, 우리가 만든 정원의 이름이기도 했다. 우리의 비전이 ‘인간 자아실현의 모든 과정을 혁신한다’라는 무지막지한 스케일을 자랑하기도 해서 위토피아라는 이름은 썩 잘 어울려 보였다. 'Wetopia'는 사전에 없는 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듣는 순간 ‘위토피아요? 다 같이 잘살자는 뜻인가 보죠?’라면서 바로 알아듣는 것도 신기한 지점이었다.
회사 이름을 짓는 것과 달리, 우리가 만드는 커머스 플랫폼의 이름을 정할 때는 좀 더 힘들었다. 거의 한 달쯤은 모든 멤버들이 이름 짓자고 앉기만 하면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사무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던 것 같다. 밴드 이름을 지어준다는 랜덤 네임 메이커에 아무 단어나 넣어보기도 하고, 온갖 그리스 신화니 전통민속 설화니 하는 책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원래 있던 서비스의 패러디 같은 이름도 찾아보았다.
by Midjourney
이 글을 쓰려고 그때 만들었던 마인드맵 파일을 열어보았는데... 당시엔 그 이름들이 기발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꺼내보면 너무 창피하기 때문에 굳이 자진하여 셀프 조리돌림을 하지는 않겠다. 아무튼 우리 플랫폼 이름은 우여곡절을 거쳐서 뭔가 좋은 것을 발견했을 때 나오는 감탄사인 ‘Hooaah’로 하자고 정했고 뜻도 발음도 생김새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플랫폼 이름을 막 지었을 때만 해도 워낙에 큰 회사들은 회사 이름과 서비스 이름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렇게 하는 게 업계의 정석인 줄 알았다. 우리가 꼭 Hooaah만 할 것도 아니고 다른 것을 만들 수도 있으니 회사 이름하고 서비스 이름이 다른 게 뭐가 문제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너무 안 알려진 회사라는 것이었다. ‘당근이세요?’라고만 해도 고개를 서로 끄덕일 정도가 아니라면, 스타트업이란 대표 이마빡에 회사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서라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어필해야 하는 숙명이 있다. 그런데 회사 이름은 위토피아이고 서비스는 Hooaah인데 또 그 서비스 이름은 영문으로 써야 하고… 위토피아? 유토피아? 후아는 또 뭔데? 후와? 우와? 후야? 호야?? 이렇게 짧고 쉬운 이름도 이토록 다양하게 잘못 읽힐 수 있다는 점에 매일같이 놀라는 일이 이어졌다.
더 큰 문제는 고객들이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가끔 PG 사용을 불편해하는 고객분들이 전화로 주문을 하신다기에 무통장입금으로 주문을 받고 계좌번호를 안내해 드렸다. 그런데 다시 격앙된 목소리로 전화가 와서, ‘나는 후아에서 주문했는데 왜 위토피아로 입금하라는 것이냐. 이거 사기 아니냐’라고 항의하는 고객부터, 셀러들도 명함 받을 때는 위토피아였는데 또 가입은 후아에서 하는 건 뭐냐, 너희 제대로 된 회사가 맞느냐 하며 수상스러워하셨다. 그분들 앞에서 ‘토스를 만든 비바리퍼블리카 아세요? 스타트업은 회사 이름과 서비스 이름이 다른 경우가 많아서 블라블라…’ 이렇게 잘난 척을 할 수도 없었다. 아무튼 하나를 알리기도 힘든 판에 이름이 두 개라는 건 명백히 걸림돌이었다.
더 늦기 전에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안동에 있는 청년전용센터의 입주기업으로 선정되어 법인 주소지를 옮길 상황이 되었을 때, 어차피 관할지가 바뀌어 정관을 수정하고 등기도 새로 해야 하니 이 김에 회사 이름도 바꾸기로 했다. 더 유명해지기 전에, 더 많은 계약서에 회사 이름이 등장하기 전에 빨리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마 회사 이름과 플랫폼 이름이 다른 수많은 회사들은 둘 중 하나를 바꾸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법인명을 바꾸는 절차 자체는 아주 복잡하지는 않았다. 이사회를 열어 의사록을 만들고, 정관에 있는 법인의 명칭을 바꾼 후, 대법원 인터넷등기소로 들어가서 매우 불편한 UX를 감내하며 법무법인에서 공증된 회의록과 몇 가지 서류를 제출하면 됐다. (내가 굳이 법무사 수수료를 아끼겠다고 셀프등기를 하느라 벌인 온갖 삽질에 대해서는 그냥... 생략하겠다). 절차에 맞게 서류를 모두 제출하자 이삼일 안에 등기는 완료되었다.
엔드리스 행정절차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혹시 개명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그렇다. 나는 개명을 했다). 개명 절차는 쉽다. 그러나 원래 이름으로 등록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쫓아다니며 새로운 이름으로 바꿔야 하는 것이 어렵다. 은행, 통신사, 한국전력, 각종 써드파티 서비스에 직접 방문하거나 우편으로 서류를 송부하거나 스캔한 서류를 팩스로 송부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내가 행정 서류 찍어내는 로봇이 된 기분을 실감 나게 맛보았다.
더 문제는 위토피아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한 일 년 남짓 동안 만났던 사람들, 거래처, 관공서 등 많은 분들에게 이 사실을 고지하는 것이었다. 다 뿌리지도 못한 수백 장의 명함을 불쏘시개로 쓴 후 새 명함을 다시 뿌려야 했다. 대부분은 그러려니 했지만 지원사업 수행기관 담당자, 각종 인증기관 담당자들은 곤혹스러워했다. "회사를 폐업하신 건가요...?"라는 질문에 그때마다 ‘사업자번호 법인등록번호 여전히 같고요, 대표자도 같고요. 회사 다시 만든 거 아니고요. 그냥 이름만 바뀌었어요. 아, 주소도 바뀌었구요.’라고 앵무새처럼 해명을 반복했다(그리고 역시 서류 한 뭉치를 팩스를 보내야 했다).
아무튼 3~4개월간의 폭풍 같은 과도기를 지나고 나니 그제서야 예전 회사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너희는 누구니?"라는 질문에 심플하게 "후아입니다, 주식회사 후아."라고 제임스 본드처럼 답하는 것도 어느새 익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