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지원사업,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쓸 때까지만 해도, 후아 멤버들은 꽤 자신만만했다. 2021년 처음 도전했던 예비창업패키지에서 단번에 붙었기에, 장차 우리의 앞길에는 찬란한 금빛 보도블럭이 깔려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보통 창업지원사업 중에서도 ‘구찌’가 큰 것들은 주로 연초에 공고가 뜨는 청년창업사관학교, 초기창업패키지, 비대면 스타트업 같은 것들이다. 지원금이 가장 많고, 인건비 지출이나 기자재 구입도 가능하며, 사업에 선정된 것 자체의 네임밸류도 있다. 보통 예비창업패키지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기업들은 다음 순서로 이런 사업들에 으레 선정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였을까. 2022년 우리의 지원사업 농사는 말 그대로 죽을 쒔다. 물론 1년이 지난 지금은 뭐가 문제였는지 너무나 잘 알지만, 당시에는 정말 좌절스러웠다. 적어도 발표까지는 가서 심사위원 얼굴을 보고 질문에 답이라도 한 뒤에 떨어졌으면 모를까, 서류부터 탈락하니 ‘너희는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스타트업이 아니야!’라는 낙제 도장을 이마에 꽝 하고 받은 기분이었다(물론 나중에 서류 통과한 후 발표에서 떨어져 보니 그건 그것대로 또 기분이 별로였다…).
by Midjourney(AI)
결국 2022년 상반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중소기업벤처부에서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글로벌 액셀러레이팅’ 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이것도 나름 경쟁률이 높고 선정되기 힘들었지만, 지원금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그나마도 대부분 해외 출장 여비로 써야 했다. 그밖에 굿즈 제작을 지원하는 사업이나 상표등록을 지원해 주는 ‘작은’ 사업에 각각 하나씩 선정된 것 말고는 2022년의 지원사업 수확은 끝이었다.
사실 나는 이쯤 되었을 때 ‘우리 사업 모델이 지원사업과 안 맞는 것이 아닌가, 죽을 판에 들어가서 시간과 에너지와 자신감을 소진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좌절에 빠져 있었다. 어쩌면 그때 나는 일종의 ‘우등생 증후군’에 걸렸던 것 같다. 잘한다고 칭찬을 받아야만 의욕을 내고,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고개를 내민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액셀러레이팅 사업으로 샌프란시스코의 Mind the bridge에 다녀오고, KAIST에서 열린 스타트업 커뮤니티 행사 K-ABC, 투자유치를 위한 네트워킹 등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다른 스타트업 대표를 많이 만나보면서 그런 좌절은 바보 같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작년에 10개 남짓 지원했을 뿐이었지만, 웬만한 스타트업들은 매년 지원사업 몇십 개는 기본이고, 여력이 되면 백여 개쯤 넣는 것은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기업으로서 성과를 내고 '대박'이 터져 투자유치를 기대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떻게든 초기 스타트업의 J커브(a.k.a. 죽음의 계곡)를 견디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원사업만한 '꿀'이 없었다.
by Midjourney(AI)
게다가 세계적으로 봤을 때 한국처럼 초기창업기업에게 국가가 나서서직접적으로 지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해외진출을 서두르지 말고 한국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모조리 받으라고 한국 멘토건 미국 멘토건 교포 멘토건 우리에게 일관된 조언을 해주었다.
그래서 2023년을 맞이하며 우리는 스스로의 오만함과 무지를 깊이 성찰하고 고시공부하는 마음가짐으로 지원사업에 대한 조사와 연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놈의 지원사업들은 오만 가지 국가기관의 웹사이트에제각각 예고 없이 뜨기에, 관련된 사이트를 정기적으로 훑어야 했다. 할만한 사업이다 싶어도 우리의 기존 사업과 중복지원이 안 되는 것도 있고, 자격요건이 제한된 것도 있으며, 무엇보다 사업의 성격에 따라서 중점을 두는 부분이 조금씩 달랐기에 그에 맞추어 준비를 해야 했다.
초기창업지원사업은 창업자의 열정과 끈기, 순수함(?)에 가산점이 있다면, 콘텐츠 사업은 창의성과 함께 그 콘텐츠를 만들 능력이 있는지, 지역정착 사업은 지자체 및 지역주민과의 커뮤니티 형성이 가능한지, 수출사업은 수출실적이 있는지, IP(지식재산권) 사업은 특허를 출원할만한 경쟁력이 있는지, R&D 사업은 연구실적이 있고 학술적 가치와 비즈니스적 가치가 둘 다 있는지, 공공기관 입찰은 그냥 그 일을 제대로 할 전문성이 있고 업력이 오래되었는지 등등… 거기에다가 지원기관마다 성향이 다르고 심지어 심사위원 운까지 있기에 100% 확실한 합격비법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떤 사업에서 서류탈락한 사업계획서를 토씨 하나 안 바꾸고 다른 사업에 그대로 제출했는데 최종합격했다는 식의 사례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하지만 모든 사업에서 공통된 합격비법이 하나 있긴 했다.일단 화살을 쏴 봐야 과녁이 얼마만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아직 안 쓴’ 끝내주는 사업계획서보다는 ‘어떻게든 쓴’ 허접한 사업계획서가 백 배 나았다. 설사 지원했다 떨어지더라도 어쨌든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라는 경험치가 생기는 데다가, 발표심사까지 가기라도 하면 심사위원들에게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아무튼 되면 좋고 안 되어도 뭔가는 얻을 수 있었다.
우리의 문제가 뭐였는지 스스로의 힘으로는 알기 어려웠기에, 여기저기 사업계획서를 보여주고 피드백을 청했다. 그중 예비창업패키지를 하면서 만나게 된 멘토분께서 2022년에 우리가 모조리 서류광탈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는지, 2023년도 지원사업 서류를 준비할 때에는 거의 스파르타식으로 우리의 사업계획서 초안에 빨간줄을 그으면서 (ex. "대표님, 이렇게 써놓으면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가열차게 멘토링을 해 주셨다. 그래서였을까, 올해는 넣는 족족 서류에서 통과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그렇게 자격이 되는 모든 사업에 죽자고 도전한 결과, 가장 처음 시도했던 청년창업사관학교(청창사)에 입교생으로 선정되었다. 청창사는 창업지원기관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이기도 했고, 그 유명한 토스의 이승건 대표를 배출한 기관이라는 네임밸류에, 실질적인 교육과 멘토링, 기업간 네트워킹 등을 가장 ‘빡세게’ 시키는 곳이었다. 중소기업벤처부 사업들은 중복제한이 있었기에 서류심사에 붙은 다른 사업들을 포기하고 청창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하나 선정됐다고 끝이 아니었다. 그 뒤에도 민진하 대표가 새로운 지원사업이니, 무슨 바우처니, 액셀러레이팅이니, 경진대회니, 입찰이니 하는 것을 계속 물어오는 바람에 나는 매일 아침 책상 앞에 앉아 내적 비명을 지르며 1분기를 보냈다. 사업계획서 양식이라는 것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또 자잘한 부분에서는 왜 그렇게 다른 건지, 이론적으로는 계속 복붙을 하면 되지만 막상 닥치면 매번 조금씩 수정보완을 하며 밤을 새우는 상황이 이어졌다.
by Midjourney(AI)
그러다보니 청년창업사관학교와 중복제한에 걸리지 않는 마케팅 지원 사업도 하나 건지고, 청년 1인을 2년간 고용할 수 있는 인건비 지원사업에도 선정되고, 스타트업 엑스퍼트 경진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하고, MS에서 자기들 글로벌 발표 행사에 참여하느라 수고했다며 만 달러 정도의 클라우드 서비스 크레딧을 주기도 하는 등… 크고 작은 성과들을 줍줍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서류에서 광탈한 피투성이 사업계획서와 이불킥을 유발하는 날카로운 발표의 추억이 훈장처럼 남았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게 여러 사업에 도전하면서 참고 삼아 작년에 썼던 사업계획서를 읽어보니, 거 참… 가관이었다. 멘토와 심사위원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알 수 없던 표정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대체 얘네들은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지? 이미지와 도식을 쓰면 될 것을 왜 말로 줄줄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돈을 어디에 쓰고 어디에서 벌겠다는 것인지? 왜 전 인류를 타깃으로 삼고 있는 것인지? 3명의 스타트업 멤버가 1년간 할 수 있는 일의 양이 맞는지? 예산 항목별 구체적 근거는 무엇인지? 사업종료 시점의 KPI(핵심 성과 지표)는 무엇이며 그것을 달성할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쓴 문서에는 하루에 수백 개의 사업계획서를 읽는 사람을 배려한 간결함의 미학이 없었다. 결국 사업계획서도 비즈니스의 문법을 가진 일종의 작품 아닌가. 우리는 그 작품을 읽을 독자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생각나는 대로 떠드는 게 아니라, 읽는 사람이 궁금할 내용을 체계적으로, 줄 간격과 폰트 크기는 일관되게, 깔끔한 개조식과 스타일로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추어 문서를 구성해야 했다.
심사위원들이 궁금할 내용이라는 것도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이 돈을 주면 과연 얘네들이 엄한 데로 슈킹하지 않고 규정에 맞게 써서 1) 지원금보다 더 많은 매출달성 or 2) n명의 고용 or 3) 몇 억의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사업계획서를 통해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어야 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작년엔 몰랐던 것이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다. 지나고 보면 그렇게 쉽고 간단한 걸 왜 모르고 삽질을 했나 싶지만, 그 삽질을 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역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의 시즌 1에서 진작 배웠어야 할 삶의 이치를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 백발백중의 명사수가 되는 것도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화살을 만 개쯤 쏴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아니, 그 명사수도 무수한 실패를 딛고 그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말이다.